박명숙 댄스씨어터 '윤무'100여 년 전 성에 대한 쾌도난담 연극ㆍ영화 이어 춤으로 재해석

강강술래는 우리나라 고유의 춤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형태의 춤이 있다. 손에 손을 맞잡고 사람들이 원을 이루며 추기 때문에 원무(圓舞) 또는 윤무(輪舞)라 불리는 이 춤은 상황에 따라 원 안에서 각자의 테마를 만들어내며 나라마다의 특색을 이루게 된다.

독일에서 이 춤에 관심을 보인 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오스트리아 문단에서 활약했던 성애(性愛) 심리의 대가 아르투어 슈니츨러다. '문학계의 프로이트'라는 그가 쓴 <윤무(Reigen)>(1897)는 원초적이고 솔직한 성 담론으로 100년 동안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고 있다.

지난주에는 박명숙 경희대 교수가 이끄는 '박명숙 댄스씨어터'가 이 작품을 기반으로 열흘간의 공연에 들어가 이목을 끌고 있다. 100년 전의 성 담론을 오늘날 새삼스럽게 끌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 영화, 뮤지컬, 종횡무진하는 성(性)의 춤

창녀, 병사, 하녀, 남편, 아가씨, 작가, 여배우, 백작 등 열 명의 남녀가 교대로 나와 열 개의 에피소드를 만든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건 다름아닌 성(性)과 사랑에 관한 쾌도난담이다.

100여 년 전, 소설과 희곡 <윤무>가 등장하자 19세기 사회는 당장 술렁대기 시작했다. 동시대의 프로이트조차 '우리의 진정한 동료'라고 인정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성을 노골적으로 테마화해 그 욕망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보수적인 당시 사회로서는 이런 작품을 그대로 가만둘 수 없었다. 결국 재판에 회부된 이 작품은 사회를 더욱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21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 작품을 번안한 연극이 공연될 때는 경찰이 들이닥쳐 강제로 막이 내려졌다. 기록상으로는 이후 공연을 강행했다가 외설 혐의로 또 다시 6일 동안 재판에 회부됐다.

1998년에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열 명의 인물을 단 두 명의 배우가 소화해내며 색다른 해석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스크린으로의 데뷔는 독일의 명감독인 막스 오퓔스의 <윤무>(1950)로 이루어졌다. 감독은 여기서 10인의 복잡한 행각을 내레이션으로 보완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강박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한 로제 바딤에 의해서는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 롱드>는 2006년 국내에서 뮤지컬로 재등장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열 명의 캐릭터가 교대로 한 쌍씩 짝을 이뤄 솔직하고 거침없는 몸짓들은 현대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으로 재해석됐다는 평가를 이끌어낸 바 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온 '윤무'

A Circle Dance, Reigen, La Ronde, Round Dance …. 약 110년에 걸쳐 다양한 이름과 형식으로 변주되어온 <윤무>는 이번에는 춤판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춤을 통한 욕망의 반영이 원작의 테마였던 만큼 춤과 몸짓을 통한 원작의 재해석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시도일지 모른다.

열 명의 인물에서 열 개의 에피소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기존 작품들과 비슷하다. 창녀와 병사의 실랑이에서 시작되는 첫 장은 병사와 하녀의 이야기로 중첩되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백작이 다시 창녀와 조우하는 것으로 관계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제목인 '윤무'는 이처럼 끝없이 원을 이루는 관계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다른 장르에서는 주로 대사를 통해 설명되었던 것들은 이 작품에서 춤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과 순간의 망설임, 분출시킨 분노와 고통스러운 억압 등은 말보다 몸짓일 때 더욱 극명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에피소드가 교차할 때 두 에피소드를 매개하는 인물의 태도 변화는 관계의 상대성을 보여준다. 창녀에게 막 대하던 병사는 하녀가 나타나자 태도가 돌변한다. 유부녀는 젊은 남자와는 대등한 위치에서 쾌락의 몸짓을 주고 받지만, 남편이 있는 집에 돌아와서는 로봇처럼 가사일에 전념하는 주부가 되고 만다.

욕망의 충족과 이별에 대한 통찰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여자와 남자 모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매혹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상대방에게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인다.

공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백작은 작품 밖 변사로서 추상적인 테마와 각 에피소드 사이의 빈 칸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지만, 큰 뼈대와 각 인물들의 존재만으로도 작품의 취지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이번 공연을 총지휘한 박명숙 예술감독은 "인간관계가 갈수록 황폐해지는 오늘날엔 남녀 간의 사랑도 생물학적 욕구 충족이나 상품화,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며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을 들춰보고 인간관계의 건강함을 회복하기 위한 토론의 장을 열고 싶어 19세기의 희곡을 오늘 우리의 상황으로 맞게 재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은 이번 작품을 통해 관찰자의 자리에서 사랑과 욕망에 대한 세기 불변의 통찰을 지켜볼 수 있다. 특히 성(性)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관객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