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초연 , 최고 소프라노의

국립오페라단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서 '블랑슈'역을 맡은 소프라노 아닉 마시스
해외의 클래식계가 유럽 객석보다 젊은 관객이 자리한 한국 무대로 눈 돌린 지는 오래됐다. 덕분에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아도 굴지의 오케스트라나 세계적인 성악가와 연출가들의 합작품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됐다.

올해 특히 주목할 만한 두 편의 오페라가 5월에 공연된다. 세계 오페라 무대의 명망 높은 크리에이티브 팀과 성악가가 선보이는 대형 오페라로 기대를 모은다. 프랑스 모더니즘 오페라의 시초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가 국내 초연하고, 1948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며 한국 오페라 역사와 함께 해온 <라 트라비아타>가 이탈리아 최고의 소프라노 공연으로 막을 연다.

두 오페라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수녀와 매춘 여성이라는 상반된 캐릭터로도 눈길을 끈다.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수녀들

1789년 구 제도를 뒤엎으며 역사의 흐름을 바꾼 프랑스 혁명은 문학, 미술,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모티프가 되었다. 오페라도 예외가 아닌데, 1957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한 후, 곧 현대 오페라 고전으로 자리 잡은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는 당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2010년 프랑스 니스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카르벨회 수녀들의 대화>
1794년 7월 17일 카르멜회 수녀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바 있는데, 프랑스의 국민작곡가로 불리는 프란시스 풀랑(Francis Poulenc, 1899-1963)의 이 오페라는 독일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한 달 만에 파리에 있는 모든 성당은 문을 닫았다. 2%에 불과한 1,2계급이 프랑스 전체 토지의 40%를 소유하고 있었던 앙시앵 레짐(구 제도)에서 제1계급이었던 성직자에 대한 혁명군들의 적개심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극에 달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주교를 포함한 사제와 수녀, 수도자들을 투옥하고 대학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1793년에는 프랑스에서 그리스도교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며, 그리스도 기원(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서력)으로 된 날짜도 사용이 금지됐다.

공포스러운 상황은 몇 년간 이어졌고, 그 대상이 된 성직자 중엔 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콤비네의 카르멜회 수녀들도 있었다. 카르멜회는 엄격한 계율과 검소한 생활 원칙을 가진 탁발수도회의 하나다. 혁명 1년 후 모든 재산을 약탈당한 수녀들은 그곳에서 쫓겨나 콤비네 성당 부근에 머물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1794년 수도생활을 이어간 것을 죄목으로 들어 그들은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는 이 과정이 블랑슈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그려진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로 열연할 소프라노 마리엘라 데비아
전체적으로 낭송 조의 대사인 레치타티보가 현대적인 오케스트라의 선율 속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자아내는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14명의 수녀가 차례로 단두대에 오르는 장면이다.

혁명 광장의 단두대로 이송된 수녀들은 마리아 찬미가인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합창한다. 수녀원장부터 차례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합창소리는 점점 잦아들지만, 날카로운 칼날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스쳐 공포감을 더한다.

연출은 맡은 스타니슬라스 노르디는 이 작품이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내밀한 본성과 삶의 본질과 죽음, 종교, 공포에 대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던진다"며 현대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소통가능한 지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주인공인 블랑슈 역은 프랑스 출신의 소프라노 아닉 마시스가 맡았다.

프랑스 최고 문화상인 '문화예술공로 훈장 기사장(The Chevalier de l'Ordre des Arts et Lettres)과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황금 기러기상(La Siola d'Oro)을 수상한 바 있으며, 조안 서덜랜드의 계보를 잇는 프리마돈나로 이름이 높다.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Les Dialogues des Carmelites >는 5월 5일부터 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첫선을 보인다.

길을 잘못 든 여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백꽃을 든 여인>을 개작해 오페라 공연으로 올린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오페라였던 이 작품은 이후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붉은 동백꽃을 들고 화려한 무도회며, 살롱 등의 사교장을 드나들었던 파리의 고급 창부가 주인공이다.

뒤마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살려 집필한 소설로 당시에 빼어난 미모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았던 마리 뒤프레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동백꽃 덕분에 '춘희'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오페라 제목인 '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 여인'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힘찬 '축배의 노래'로 유명한 <라 트라비아타>는 고급 창부 비올레타와 순진한 귀족 청년 알프레도의 비극적인 사랑이 주된 내용이다. 알프레도를 만난 후 창부 생활을 청산한 비올레타는 그러나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의 반대에 부딪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고독하고 병든 삶을 마감한다. 그때 그녀가 체념한듯하면서도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가 '안녕, 지난날이여'다.

"안녕, 지난날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꿈이여 / 장밋빛 얼굴도 아주 창백해지고 / 알프레도의 사랑조차 지금 내게는 없다"(<내 마음의 아리아>(안동림 저) 발췌)

아버지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프레도는 급히 그녀를 찾아오지만 그녀는 폐병으로 죽어가면서 절규하며 부른다. 지금껏 마리아 칼라스를 능가하는 비올레타는 없었다는 게 오페라 애호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마리아 칼라스와 조안 서덜랜드의 계보를 잇는 벨칸토 소프라노 마리엘라 데비아가 세기의 소프라노들의 빈 자리를 채운다.

고난도의 기교와 풍부한 표현력이 강점인 데비아는 "이탈리아에서는 절대적 위상의 소프라노이며 성악 지망생에겐 신적인 존재"(유형종 음악칼럼니스트)로 평가받는다.

국내 무대에서는 2004년과 2008년 두 차례 독창회를 한 바 있지만 오페라 무대에는 처음이다. 자신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인 <라 트라비아타>에서 데비아는 최근에도 비올레타로 무대에 서왔다. 2008년에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바리톤 레나토 브루손과 공연해 큰 성공을 거뒀고, 2009년에는 이탈리아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한국에도 내한한 바 있는 피치의 연출로 명불허전의 무대를 보여줬다.

세트와 의상, 조명 등을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화려하고 극적인 무대를 선보일 <라 트라비아타>는 오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