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차별 신호등 개선안(15)만화가 주호민 '절대 평등 신호등' 통해 서울시 주장 조목조목 풍자

21세기의 한국만큼 남녀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을까. 돈 없는 남자를 무시하는 여자와, 버는 돈에 비해 소비 수준이 턱없이 높은 여자를 경멸하는 남자들은 오늘도 웹 상에서 거친 말로 서로를 헐뜯는다. 그렇잖아도 낮은 출산율로 몸살을 앓는 이 나라의 장래가 염려되는 요즘,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보행 신호등 화면에 남자만 들어가 있는 것은 남녀 차별이므로 여자도 보행 신호등 화면에 넣자."

여성부의 무리수인줄 알았던 이 주장의 출처는 의외로 서울시다.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에 제출된 이 안건은 "200억 원의 예산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보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시가 해외 사례를 추가해 제출할 경우 재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잔뜩 예민해져 있던 네티즌들이 우르르 달려 들었다.

만화가 주호민은 '본격 신호등 만화'로 서울시의 주장을 조목조목 풍자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신호등 개선안을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 단발 머리에 바지를 입은 여자로 바꾸고, 또 다시 '약하고 의존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염려해 여자가 남자의 손을 이끄는 그림으로 바꿨다.

여기에 연령 차별을 파괴하기 위해 아이와 노인을 추가하고, 장애인 차별을 반대해 휠체어 탄 사람을 그려 넣은 다음, 인간 중심 사고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개까지 추가, 총 여섯 개체가 다 함께 손 잡고 횡단하는 '절대 평등 신호등'을 완성했다.

"200억이 장난입니까?"

간만에 남녀가 입을 모아 욕할 수 있는 건수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서울시의 제안은 차라리 평화롭다. 그러나 이 민족이 마주하고 있는 남녀 문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남편에게 아침 밥을 차려주는 문제' 하나만으로도 맞벌이와 더치페이, 군대, 시댁 문제가 줄줄이 따라 나오며 본격적으로 상 욕이 오고 가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권 신장이 한창 활발히 진행되는 사회에서 남녀 간에 벌어지는 극한의 대립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가 마주한 자본주의의 폐해와 여성의 독립을 주제로 한 버나드 쇼의 희곡 <워렌 부인의 직업>은 지금의 상황과 일부 닮은 부분이 있다.

가격, 서비스 수위 별로 체계화된 한국의 매춘 산업은 다름 아닌 워렌 부인의 직업이며, 그녀의 딸 비비는 캠브리지 대학의 수학경시대회에서 3등을 한 '배운 여자'의 전형으로 지금의 골드 미스와 비슷하다.

비비는 남자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이 쥐면서 악수한다거나 혼자서 무거운 물건을 번쩍번쩍 드는 여자로, 주변의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남자들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어머니도 남편도 필요 없다고 외치는 자립적인 직업인이다.

작가는 비비를 통해 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사랑이나 결혼이 개인의 자유와 소명에 개입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여성상을 만들어낸다.

1893년에 공명한 이 외침은 지금 들어도 신선할 만큼 대단히 진보적이며 파격적이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로지 작가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한 사회 구조 때문일까? 쇼는 만인평등의 해결책으로 신호등에 여자를 포함시키는 대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지력과 의지를 통해 발전할 수 있으니 여자들도 배워서 인류 발전에 동참하라고 부르짖는다. 작가가 살던 시기보다 교육 조건이 개선된 지금, 평등을 성립하는 데 한 축이 되어야 할 여자들의 의지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자라면'으로 시작하는 각종 역차별적 요구는 결국 가부장제가 날린 부메랑이지만 그것에 안주하는 여자들 역시 스스로의 열등한 위치를 수용하고 보존하는 격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