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다 과정서 다양한 요소들 포함한 모든 시도들기존 예술언어와 방법론 넘어 모든 층위 묶는 범주로

극단 몸꼴의 <허기진 휴식>(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
연극인 듯하면서도 춤 같기도 하다. 공연장에서 이루어지지만 설치미술에 가깝다.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도 있다.

이 모든 현상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 '다원예술'이다. 그럼 거꾸로 말하면 다원예술이란 뭘까. 스스로를 연극인, 무용인, 영화인으로 부르는 이는 있어도 다원예술인을 자칭하는 이는 없다. 이처럼 다원예술이 오랫동안 모호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다원예술의 창작지형과 접근 방식에 대한 맥락을 최근 흐름과 함께 짚어보았다.

경계 위를 떠다니는 용어 '다원예술'

국내에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현장이나 학계보다 정책이 먼저였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범과 함께 다원예술소위원회가 생기면서 다원예술은 그해 단숨에 공연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다원예술적 시도들이 현장에서도 이때부터 나타난 것은 아니다. 1998년 홍대 주변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립예술제(지금의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는 다원예술 분야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일으킨 시발점이 됐다.

한선미의 <몸으로 듣기>(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
즉 이 축제의 성공은 기존 장르가 독립, 대안예술 등 비주류 예술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2001년에는 '독립예술 지원사업'을, 2002년부터는 '다원적 예술지원' 프로그램으로 계속해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초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규정한 '다원예술'의 의미는 그 영어표기대로 '학제 간 예술(Interdisciplinary Arts)'로 해석됐다. 즉 작게는 예술 장르 간 융합을 통한 실험적 창작활동에서 크게는 예술과 다양한 문화적 가치의 상호연계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었다.

대체로 문학, 춤, 음악, 연극, 영화, 미술 등의 모든 예술 분야가 혼합된 혼성 장르를 가리키면서 기존 예술과 다른 모든 비주류 예술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애매한 용어는 현장에서 순조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책적으로도 도중 폐기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기 구성 이후 다원예술은 소위원회의 폐지와 함께 '실험적 예술 및 다양성 증진 지원'이라는 말로 대체됐다.

이상한 것은 이 용어가 현장에서는 그대로 남아 다양한 방식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소연 연극평론가는 이 지점에서 "이 용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정책담론과 비평담론이 혼재됐던 초기의 혼란이 극복될 가능성으로도 볼 수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임민욱의 <불의 절벽>(페스티벌 봄)
더 다양하게 진화하는 다원예술

'다원예술'은 한동안 장르 간 융합(Multi-disciplinary)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활용돼왔고, 또 그런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현재 쓰이고 있는 '다원예술'은 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김소연 평론가는 "대표적인 다원예술축제인 페스티벌 봄에서 나타나는 다원예술은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작품들의 동시대성을 의미하고,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신인과 기성을 가리지 않는 개방성과 독립예술로서의 정체성을 가리키며, 마임축제나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에서는 비주류 예술의 개별적 움직임을 다원예술의 의미에 통합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원래의 의미에서 그 범위가 훨씬 더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처럼 다원예술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기존의 정의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이 새롭게 편입된 다원예술적 시도들을 예전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극단 몸꼴의 윤종연 대표는 "우리 작업이 '마임'으로 불려질 땐 그것이 주는 편협한 이미지 때문에 관객의 생각의 폭도 너무 좁아서 불편했다"고 털어놓으며 "어느샌가 '신체극'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지금은 예전보다는 인식이 좋아졌지만 장르의 규정은 언제나 부담감을 동반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서현석의 <헤테로토피아>(페스티벌 봄)
그는 "우리 작품으로 다원예술축제에 참여할 때도 사람들은 '저게 무슨 다원예술일까'라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는데, 이런 장르에 대한 고정된 인식이 공연자들을 좀 불편하게 한다"고 편견을 경계한다.

극단 서울괴담의 유영봉 연출가는 작업 행보 자체가 다원예술인 경우다. 미술을 전공한 시각예술가인 그는 무대디자인을 하다 음악과 설치, 영상 등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도 이런 시각적 도구들을 활용한 신체 표현방식이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모든 예술이 다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원예술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며 "그런 용어를 막연히 쫓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소연 평론가는 "평단이나 관객 등 외부에서 규정한 용어에 공연자가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정리하며 "윤종연이나 유영봉의 작업처럼 다른 스타일의 예술이 만나는 장으로서도 그 기능은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나"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에 덧붙여 "다원예술은 이제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한 모든 시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며 "기존의 예술언어나 방법론에 갇히지 않는 모든 예술의 층위를 묶는 범주로서 다원예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