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석주-문학평론가 신형철 대담1930년대 근대 경성의 문학 빌려 21세기 동시대 현실의 내면 들여다보기

한국근대문학 100년사에서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작가 이상에 관해 책을 쓴 평론가 장석주와 이상에 관해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평론가 신형철이 만나 이상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1920년대 쓴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벤야민은 근대 유럽의 아케이드에서 수백 년 전 독일 비애극을 재현하며, 구원의 희망이 깨진 17세기 유럽의 세계관과 정서, 정치와 미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20세기 양차대전의 위기 속에서 이 한물간 예술극을 꺼낸 이유는 "세계에 대한 절망과 경멸을 표현"하는 비애극을 통해 당대 유럽 내면의 비애와 고통을 바라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로서 비애극을 다룬 것이다.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이상의 작품을 읽는 것은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1930년대 근대 경성의 문학을 빌려 21세기 동시대 현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일본어와 조선어가 섞인 시를 해설 없이 읽어낼 수 있는 오늘의 독자는 많지 않다. 이상의 삶과 작품을 별자리로 엮어 안내할 길잡이도 필요하다.

최근 출간된 장석주의 <이상과 모던뽀이들>은 이상의 삶과 작품을 통해 1930년대 근대경성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그 풍경은 근대의 끝머리에 선 '지금-여기'를 "성좌로서" 비추고 있다. '미스코시백화점'으로 대표되는 1930년대 경성을 읽으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명동 거리를 떠올리게 된다.

저자인 장석주와 에게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문학평론가, 시인, 라디오 DJ 등 다방면에서 활동해온 장씨는 그동안 "한국 최고의 작가는 이상과 김유정"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을 만큼 이상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와 에세이 <느낌의 공동체>를 낸 은 최근 이상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다.

이상, 박태원(소설가, 뒷줄), 김소운
우리는 왜 이상을 얘기하는가?

국내 문인에게 이상은 매력적인 작가이지만, 두 사람이 이상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각자 달랐던 것 같다. 계기를 말해달라.

장석주) "재작년 12월 한 일간지에서 이상 탄생 100년(2010년)을 맞아 이상에 관한 글을 청탁했다. 이상을 평소 좋아하는 작가이자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주일 만에 이상에 관한 30권의 책을 다시 읽고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총 9번 연재했는데, 연재 중에 구본웅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받았다. 칼럼의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해주었고, 몰랐던 비화도 들려주었다. 제보(?)도 있고 연재했던 글도 있어 책을 쓰기로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책 쓰기가 훨씬 어려웠다."

신형철) "이상의 권위자도 아닌데,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좀 쑥스럽다. 흔히 근대 한국문학의 극한 한쪽에 김소월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이상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처음에는 박사논문으로 소월과 이상을 같이 다뤄볼까 생각했다. 헌데 한국시의 두 계보를 다 쓴다는 건,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처럼 한국근대시의 기원을 써야하는 엄청난 프로젝트다.

내 역량으로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내가 관심 가진 스타일의 시를 쓸 수 있게 판을 깔아준 이상의 작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자' 이런 취지로 이상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됐다."

각자 책을 쓰면서 이상의 삶과 작품이 달리 보인 지점이 있나?

장석주) "나는 책에서 이상이라는 모더니스트 시인이 나오게 된 시대, 1930년대 조선의 근대와 이상의 상관관계, 근대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상의 근대와 나의 근대는 다르지만 삶의 연속성에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읽어도 시 오감도 연작이나 단편소설은 새롭고 신기하다. 1930년대를 우리는 아주 원시시대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어떻게 이런 작품이 쓰였을까 신기했다. 이 책을 쓰면서 소비문화수준이나, 철학적 미학적 사유가 우리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충분한 깊이와 역량을 가진 시대라는 걸 알았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저자 장석주
신형철) "내가 달리 보인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흔히 이상은 당시 한국의 어떤 시인의 작품과도 닮지 않아서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라는 시선과 이상의 작품이 쓰인 시대적 배경을 찾는 시선, 두 가지로 연구를 하게 된다. 논문을 쓰기 전 나는 이상이 첫 번째 케이스(천재작가)라고 생각했다.

근데 여러 자료를 찾다가 1920년대 일본 모더니즘 잡지 <시와시론>의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읽게 됐다. '이상의 소스가 하나가 여기에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의 역량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이 일본의 첨단 모더니즘을 다른 시인과 달리 열심히 자기화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는 이상의 정치성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 이상이 활동한 시기는 1930년에서 37년 사이인데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와 맞물려있다. 만주사변이 31년, 상해사변이 32년, 중일전쟁이 37년에 일어났다. 이상의 작품에서 직접적 정치 발언은 없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치•역사적 정세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 '보통기념' 같은 시에서 나오는 '전화(戰火)'라는 단어를 실제 전쟁이 아니라 그냥 은유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해사변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게 읽을 경우 그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이 시는 아주 매력적인 시로 달리 읽힌다. 유럽의 모더니즘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걸 다 꿰고 있었던 이상이 동아시아 정세를 모를 리 없을 것이고, 직접으로 말할 형편은 못되니 간접적으로 작품에 흘려놓은 것이다."

개인적 취향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뭔가?

신형철) "하나만 꼽으리면 '오감도 15호'다. 1936년쯤에 발표한 짧은 산문시들도 좋아한다."

장석주) "나는 '날개'를 좋아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을 쓰며 그 작품만으로도 책 한 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날개'를 해체해서 1930년대 근대인의 자의식 세계, 무의식 세계를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산책자 이상이 그린 풍경

<이상과 모던뽀이들>에 대한 감상평을 말해달라.

신형철) "평을 할 수는 없고, 논문을 쓴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자료를 섭렵하셨다고 생각했다. 또 자료가 많아도 책을 쓸 때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많은데, 적재적소에 필요한 자료를 배치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이상과 1930년대 경성을 설명하며 현대비평이론을 가져오는 지점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론과 텍스트가 겉돌고 튀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읽혔다. 구체적으로 하나만 집어 말하라면 이상의 애인, 금홍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약간 정서적인 에너지를 투자했다. 금홍은 보통 이상한테 어떤 피해를 주었나에 초점을 두고 소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금홍이의 내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책은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으로 1930년대 경성을 말한다. 이런 책들과 이상의 작품은 시공간의 차이를 두고 쓰였지만, '근대'라는 키워드로 묘하게 뒤섞인다. 벤야민, 바우만의 시각으로 1930년대 경성을 보는 게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장석주) "개인적으로 발터 벤야민의 삶과 글을 엄청 좋아한다. <파사젠베르크>를 읽을 때부터 이상과 연결해서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 근대 도시가 생기면서 산책자가 등장하는데 박태원과 이상의 작품에서도 걷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 공통점들을 착안해서 썼다."

이상의 작품이 모든 문학평론가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아무리 분석해도 끝이 없는 화수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문과 논문 주제로 가장 많이 다룬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헌데 '이상이 한국최고의 작가'라는 것과 '이상 작품이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보여준다'는 말은 별개다. 이 작가가 근대 우리문학의 보편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석주) "이상은 근대의 보편성보다 특이점을 보여준다. 이상의 작품은 그 당시로서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와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근대 보편적 문물이나 철학, 풍속이 이상에게 오면 특이한 형태로 발효된다.

그만큼 전복적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책을 쓰며 '이 특이한 작가의 발생론적 근거는 뭘까?'를 생각했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라는 말도 있고 시대와의 소통으로 만들어진 작가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지 않나, 생각한다."

신형철) "이상의 텍스트를 분석하다보면 분석 자체의 회의에 빠진다. '이상의 작품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묻는 게 아니고, "이상의 작품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걸 묻게 된다. 장석주 선생은 책을 쓰며 이런 적이 없는가?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하나?"

장석주) "모든 책은 써야한다는 사명과 쓸 수 없다는 회의의 타협점에서 나온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쓸수 있지만 멈추는 부분에서 책이 나온다. 아쉽지만 가능성을 남기면서 책을 쓰고, 다른 사람이 그 지점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신형철) "나는 그 회의에 많이 빠져 있다. 전문가들이 어떤 작가를 소개할 때 3가지 단계가 있다. 사실관계를 기록하는 1차적 연구인 주석단계, 작품의 빈틈을 해석하는 단계, 이후 의미를 논하는 배치 단계다. 이상의 연구는 이 3가지 층위가 뒤엉켜 있다.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부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해석하거나, 부실한 기반 위에다가 거창한 맥락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있다. 헌데 주석 층위에서 사실관계가 바뀌면 그 주석 위에 붙인 의미들이 다 무너진다. 사상누각의 성채가 너무 많다. 이상 텍스트 연구처럼 다원주의적인 데가 없다.

한 작품에 수십 개의 해석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이상을 연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작업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근데 이렇게 하면 논문 못 쓰는 거다."(웃음)

근대 탈근대 반근대

신형철) "전문가들이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작품의 빈틈을 인위적으로 메우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의미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런 의미를 붙이는 것은 무리다'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것도 해석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이 1930년대를 살았던 작가라는 게 한계 설정의 기준이 된다.

그 당시 컨텍스트가 무엇인지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조사해서 이 텍스트의 한계를 좁혀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해석이 정답이다'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이 해석은 이상의 컨텍스트에서는 무리야'라고 해설을 쳐낼 수 있게 하려면 공시적 자료들을 열심히 봐야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은 이상이 살던 당시 신문자료, 잡지 등을 첨가해서 이상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상의 작품이 지금 세대에도 읽히는 건 우리시대에도 이 작품들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작가들 작품에서 이상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나? 이상과 요즘 작가들 접점은 뭔가?

장석주) "이상과 요즘 작품들의 접점은 많지 않다. 우선 시간적 간격이 한 세기 가깝지 않나. 그보다는 이상의 시나 소설에서 보여준 수준을 요즘 작가들이 넘어섰는가를 묻고 싶은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물론 훌륭한 작가들이 많지만, 그보다 못한 수준의 상상력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상은 우리 문학의 기준점, 넘어서야할 근거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신형철) "이상의 역량을 제대로 흡수한 작가라면 '이상이 지금 20~30대 청년문사라면 어떻게 썼을까?'를 상상하고 글쓰는 사람일텐데, 지금 그런 작가가 있을까? 언어적 측면에서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언어를 썼고, 도덕적 측면에서 난다 긴다는 친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자유분방함을 제시했고, 여러 경계를 부순 사람이다.

물론 그 이면에 19세기적 인간이 있지만. 30년대 이상이 했던 경계 넘기가 지금 본질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가능한데 작가들이 그 안에서 자족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한국 문학의 기린아 이상과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평전 형식으로 담았다. 이상의 삶과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가 활동했던 1930년대의 모습도 속속들이 파헤쳤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작가 이상을 살피는 1부, 그가 살던 1930년대 근대 경성 풍경을 재현한 2부, 경성을 산책하는 이상과 그의 벗들을 소개하는 3부. 저자는 큰아버지에게 입양됐던 이상의 심적 갈등을 프로이트의 눈으로 살펴보는가 하면, 당시 세계 문학을 이끌던 다다이즘과 미래파 속에서 그를 탐구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지만,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한 부분도 있다. 기생 금홍과의 연애담은 흡사 소설을 읽는 듯하다. 김기림•김유정•이태준 등 동시대 지식인의 일상과 그들이 나눈 우정도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고리대금업에 손을 댔던 김소월, 금광을 쫓다 폐결핵으로 숨진 김유정의 일화는 일종의 문학사다. 벤야민, 들뢰즈, 바우만 등 최근 주목받는 지식인들의 대표저서를 이상의 작품과 엮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