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규의 하얀방] 어릴 적 경험 '그림자의 방', '구더기의 방', '기억의 방'으로 구체화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이자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신작 <유진규의 하얀방>(이하 <하얀방>)으로 돌아왔다.

이번 공연은 2008년 발표된 <유진규의 빨간방>(이하 <빨간방>)의 후속작으로, 지난해 말 춘천 축제극장 몸짓에서 초연돼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전작에서 공간과 시간, 신체에 대한 색다른 질문을 던졌던 그는 이번 공연에서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빨강의 위압감, 하양도 가능하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빨간 티켓. 길을 잃으면 전화하라는 번호 앞에 적힌 '조난주파수'라는 단어가 입장 전부터 으스스하게 한다. 공포영화 관람 전에 입구에서 나눠주는 청심환처럼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무시하기 쉽지만, 입구로 들어서면 곧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온통 빨간색 줄로 채워진 방은 말 그대로 '빠알간' 방. 시각을 압도하는 빨강의 위용에 혼자 입장한 관람객들은 공포마저 느끼게 된다. 주최 측이 폐소공포증이나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고 공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빨강이 주는 공포의 근원에는 피를 연상시키는 불길함이 있다. 전시장 한켠에는 실제로 서슬퍼런 식칼이 매달려 있어서 이런 불길함을 구체적인 상상력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작가의 방에서는 유진규 작가가 '적'포도주를 대접하며 감상을 묻는다. 이 이색적인 설치공연은 한 공간에서 단색이 주는 압박을 혼자 경험하며 관객의 존재를 스스로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에 공연되는 <하얀방> 역시 단색으로 가득 찬 '미로' 같은 공간에서 헤매게 되어 있는 구조는 같다. 단색이 연상시키는 막연한 불안감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의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번 작품의 콘셉트는 세 가지의 방으로 구체화됐다. 앞마당에 널린 하얀 이불 속통 사이에서 이뤄졌던 어린 유진규의 그림자 놀이는 '그림자의 방'으로 표현된다.

골목길에서 발견한 죽은 쥐의 몸 위에 하얗게 뒤덮인 구더기의 기억은 '구더기의 방'에 옮겨졌다. 특히 지금도 마찬가지인 병원의 한결 같은 하얀색은 '기억의 방'에서 관람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새로운 마임과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

전작과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무엇보다 빨간 테이프로 시야가 가려졌던 <빨간방>과는 달리 <하얀방>은 길이 보이는 미로다. 유진규 작가는 "'방' 시리즈에서 미로는 핵심 콘셉트"라고 설명하며 "얽히고설킨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과거의 하얀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어렸을 적 기억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기억 그리고 미래의 기억까지 하얗게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빨간방> 공연 당시 '더 이상 마임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실제로 작가의 방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던 작가는 이번 공연에서도 '막걸리의 방'에서 하얀 막걸리와 함께 관객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문제의 발언이 '은퇴'가 아니라 '틀에 박힌 마임에의 거부'를 의도한 것인 만큼 새로운 시도를 통해 다양한 마임을 보여주겠다는 원래의 취지는 그대로 이어진다.

임인자 프로듀서는 "유진규는 마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곧 마임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번 '방' 시리즈에서 유진규는 마임의 화두를 '자신이 표현하는 몸'에서 '관객이 인지되어 표현하는 몸'으로 전환시킨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그동안 수동적인 참관자에 머물러 있던 관객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주체적인 참여자로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 이는 관객도 작품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 그것을 즐기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와도 일치된다.

이 같은 새로운 형태의 마임에 대해서는 유진규 작가 자신도 고민이 많다. "나는 아직도 작품은 '이 정도의 품위는 지켜야 한다'라는 고전적인 작품관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는 작가는 "그러나 젊은 관객에게서 이만큼의 반응을 얻어냈다면, 게임이나 미디어 등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적극적으로 그들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지 않나 하고 고민 중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그의 고민 때문에 '방' 시리즈는 한층 더 흥미로워진다.

적색, 백색, 흑색, 황색, 청색의 오방색을 테마로 한 '방'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유진규의 하얀방>은 지난 5일 시작돼 14일까지 매일 9시간 동안 계속된다. 시리즈의 다음 작품인 <유진규의 검은방>은 올해 12월 초연될 예정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