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이름모를 소녀' [1974]

대중은 좋아하는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근사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대중가요는 견우와 직녀를 맺어주는 오작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소위 ‘작업 송’의 키포인트는 상황이나 공간에 따라 적절한 노래 선택일 것이다. 술 한 잔을 하고 있다면 <전람회>의 ‘취중진담’이, 작업을 거는 날이 수요일이라면 <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부르며 빨간 장미를 건넨다면 효과만점이다.

최근 조관우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다시 불려 화제를 모은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는 양희은, 김의철, 태진아, 강승모, 최진희 등 무수한 가수들에 의해 장르 초월적으로 리메이크되었다. 하지만 김정호의 노래는 오직 김정호가 부를 때 명곡으로 빛을 발한다. 그가 절절하게 뱉어내는 한의 정서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슬픔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김정호는 1973년 남성듀오 <4월과 5월>의 3기 멤버로 짧은 활동 후, 솔로로 독립해 1974년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이름 모를 소녀’와 ‘저별과 달을’, ‘작은새’, ‘사랑의 진실’등 김정호의 창작곡 9곡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까지 총 10곡이 수록된 데뷔앨범은 2가지 버전이 있다. 초반과 재 반은 수록곡은 동일하지만 재킷 앞뒷면의 사진이 다르다. 모두 거대한 고목나무를 배경으로 했지만 나무 사이로 김정호의 모습이 나온 앨범이 초반이고 나무 앞에 앉아있는 사진은 재 반이다. 상대적으로 희귀한 초반 뒷면에는 편곡자 안건마의 사진과 고목나무 위에 올라가 미소 짓는 김정호의 진귀한 사진까지 실려 있다.

대중에게 각인된 그의 노래들은 이전의 통기타 노래들과 완벽하게 차별되는 새로운 사운드로 무장된 신개념의 포크송이었다. 그의 노래는 남성듀오 <어니언스>와 더불어 학생층에 한정되었던 포크송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혔던 더없이 진한 호소력을 담아냈다. 가슴을 후려치는 것 같았던 절창의 노래들은 온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발표 당시에는 '너무 어두운 곡'이라는 배척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통기타 반주로 일관했던 이전의 포크송과는 달리 현악기와 오르간의 떨리는 사운드로 편곡된 처절하고 슬픈 그의 사운드와 슬픈 가사는 강력한 중독성을 발휘했다.

김정호의 대표곡 ‘이름 모를 소녀’는 총각시절 이제는 미망인이 된 아내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사랑앓이의 감정을 스케치한 명곡이다. 당시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이영희는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한 눈에 반해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았던 짝사랑 대상이었다. 자신의 일상과 심정을 담은 연애편지를 수차례 보내고 집으로도 찾아갔지만 무명가수인 김정호가 미덥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순수한 사촌오빠의 후배가 싫지 않았던 이영희는 그의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를 듣고 자신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인 것을 직감하고 감동을 받았다.

1974년 봄, 그녀는 ‘쉘브르’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정호를 찾아갔다. 이후 3년간의 연애기간을 거친 두 사람은 1977년 결혼에 골인했다.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은 사랑의 결실이다.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1974년 11월 김수영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까지 제작된 것은 당시의 대중적 반응에 대한 증명이다. 출연료 30만원을 받고 직접 출연했던 영화엔 석찬, 홍민, 혼성듀엣 ‘원플러스원’, 포크 록그룹 ‘들개들’등 당대의 젊은 포크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당시 여주인공 정애정은 노래 제목을 착안해 자신의 예명을 ‘정소녀’로 정했을 만큼 ‘이름 모를 소녀’의 대중적 파급력은 대단했었다.

고 김정호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은 헌정공연을 헌사 받은 특별한 가수다. 70~80년대의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그의 처연한 멜로디와 가슴을 적시는 슬픈 노랫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움, 슬픔, 이별의 정서로 뒤범벅된 노래들을 토해내듯 노래한 김정호의 창법은 후배가수들에게 닮고 싶은 롤 모델로 각인되어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