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순이 읽는 김억의 국토 문예 목판화

일어서는 땅 - 운주사, 2001년작, 90.0 x 180.0 cm, 한지에 목판.
주간한국이 판형 변화와 함께 '박태순이 읽는 김억의 국토 문예 목판화'를 연재한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발로 쓴 우리 국토, 이야기가 있는 우리 국토를 나무판에 날카로운 칼로 담아내고 있는 목판화가 김억의 작품을 1983년 발표한 '국토와 민중'으로 기행문학의 장을 활짝 연 원로 소설가 박태순의 해설로 독자들과 만난다. 1964년 단편 '공알앙당'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박태순 작가는 2008년 '나의 국토 나의 산하'를 출간하면서 다시한번 '산업 국토'가 아닌 '인문 국토'에 대한 성찰을 담아냈다. 이제 김억의 국토 판화가 박태순 작가의 넉넉한 글과 어우러지면 더 깊은 '국토 사랑'의 현장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인문학과 예술이 융합하는 새로운 '국토 문예'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편집자 주>

김억 목판화는 거대담론의 국토공간미술이면서 동시에 미시담론의 국토 서정미학이다. 대하서사의 '장소미술'로 광역지역을 폭 넓게 담아내면서 여기에 미주알고주알 '풍경 미술'들을 포개고 또 포개놓는 극사실화의 구성이다. 기시감(旣視感)과 미시감(未視感), 익숙하게 눈에 담아보았던 장소가 전혀 생소한 장소로 돌변하고 있으니, 이는 공간의 확장이 되고 나아가서는 공간의 재창조가 된다.

"내가 안성 서운산 기슭에서 사는데, 산 등성이에 헬리콥터를 장만해두고 있다고 능청을 떨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가 하고 찾아 보더라고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광각(廣角)의 공간 장소성을 어떻게 포착해낼 수 있느냐고 그의 판화를 대해 본 이들이 신기해한다고 한다. 자가용 헬리콥터를 타고 풍경 사냥을 해왔을 턱은 없다. 발품을 팔고 또 팔면서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서정시인 안서(岸曙) 김억과 한자 표기까지 똑같은 예명을 갖고 있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억(億)'이라는 한자를 풀어놓으면 '인립일심(人立日心)'이 되더라면서 똑바로 서서 해바라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니, 아마 자신이 그런 '태양족' 성향의 위인일지 싶다 했다.

오늘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미 '자연경제시대의 자연'은 속절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오래 된 미래'를 관찰하고 있다. 그는 '산업경제시대의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흥미를 내보이지 않는데 전통자연의 '문화 원형'을 오늘의 국토에서 되찾고 되살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일까.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 시발점이 된다고 한다. 기술 문명의 편의성 유혹을 일단 철저하게 물리쳐야만 한다. 발바닥의 연장기계라 할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필코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아울러 정처 있기도 하는) 이 발길'이라야만 한다.

목판(木板)의 판각과 목판(木版)의 판화는 중층 예능이다. 판각의 끈질긴 추구에 이은 다색목판 인쇄 작업은 인내의 한계에 막바지로 부딪게 하는 끈덕진 노동이지만 그는 자기 수련의 터득 과정이 된다고 말한다. 나무의 생명력이 그림의 생동감과 결합되는 것이니 목판화는 살아 숨쉬는 '생명 예술'이기도 하다.

'자연성-인문성 국토'와 목판화 작업의 아름다운 만남, 이를 위하여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가. '국토 공간에서 국토 시간 끄집어 내기'이다. 국토 시간은 지질학적 시간, 문화인류학적 시간, 역사사회학의 시간 그리고 인공적인 시간(시계에 의한 시간)을 모두 오늘에 닿도록 연장시킨다. 이런 다채색의 국토 시간들을 한꺼번에 통시성(通時性)과 공시성(共時性)으로 수용하고 있는 국토 공간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한 아량인가. 화가로서는 국토의 재발견이고 목판화 작업으로서는 국토의 신발견이다.

개발근대화 시대에는 국토 공간구조의 정치경제적 개발을 위하여 국토의 입체성 시간구조를 송두리째 삽질해버렸다. '삽질 국토'는 일단 건설을 위한 것이겠으나 달리 살피면 국토의 원형을 파괴시키는 작업을 동반했던 것이 아닌가.

김억 목판화는 국토의 표층구조 속에 황금 광맥처럼 도사려 있는 국토 시간층들을 끈덕지게 목각하여 돋을새김으로 부각시켜 놓고 있다. 끄집어낸 국토 시간을 다시 국토 공간에 심어놓는 모내기 작업과 같은 과정을 통해 그 총체성의 국토미(美)가 곧 그의 작품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토미(美)의 모내기, 이앙된 국토미의 풍성한 결실, 그리고 그 수확이 되는 그의 판화 세계는 '놀라운 국토 신세계'의 출입구가 된다.

그 신세계는 가상공간이 전혀 아니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왜 누가 이 국토의 주민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일지 흡사 그는 바보 온달처럼 달려 나가고 형사 콜롬보처럼 끈덕지게 추적한다.

국토인문학은 사회과학의 영역이 되기도 하지만, 김억 목판화는 '국토문예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문학 아니라 문예학이 더욱 절실하게 앞장에 나서야 함을 일깨우게 한다.

김억의 판화는 '육체 언어'의 발성으로 다가오지만 '영혼 언어'의 흐느낌을 저장한다. 그는 '전통이냐 근대냐 양자택일' 유형의 고민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는 막연한 동양화 아니라 동양 회화의 구도와 기법의 구체성을 자신의 창작에 확보하여 구사하고 있다. 목판미술 공간 구성의 다양성, 조형성과 목판 인쇄기술의 견고한 규격성, 입체성을 창조적으로 승계한다.

국토 인문주의에서 국토 문예주의로… 김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과 학술인들의 게으름을 문책하고 이 땅의 정치 경제인이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질책하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이다.

작가노트

운주사 '와불(臥佛)'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전라남도 화순에 아주 특이한 절간, 운주사의 '천불천탑(千佛千塔)'은 어수룩하고 치졸하기까지 하지만 민중의 열망과 구원을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 이어진 곳이다.

도선국사가 용화 세계의 구현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라며 골짜기을 내려다보면 바위에 앉아 전설처럼 부처가 일어나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빌어본다.

목판화가 김억은

중견 목판화가 김억(56)은 경기도 안성에서 직접 지은 목조 가옥에서 살면서 작업하고 있다. 때론 '작은' 농사도 짓고, 마을 공동체에도 참여한다.

본명은 김종억이며,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에 몰두하며 지낸다. 우리 국토를 발로 따라가다 마음에 담아온 뒤 나무판을 촘촘히 깎고 그림을 찍어낸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스코 갤러리에서 '김억 국토', 경북 영천의 시안 미술관에서 '풍경을 만지다-김억의 재구성된 풍경'이란 초대전을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억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제주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주간한국 sosanb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