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카드 입찰에 '외국인 배제' 놓고 관치-외치 논쟁 가열, 외자유치 일변도에서 '토종 대항자본' 필요성 인식

흥건한 외국자본 잔치에 '분기탱천' 하는 토종자본
LG카드 입찰에 '외국인 배제' 놓고 관치-외치 논쟁 가열
외자유치 일변도에서 '토종 대항자본' 필요성 인식


론스타가 인수한 스타타워 빌딩

“외국인의 한국 금융기관 인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이 ‘은둔의 왕국’ 이미지를 벗었지만, LG카드 입찰에 대한 외국인 배제는 전통적인 폐쇄성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넷판) “국내 금융 산업의 외국자본 필요성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향후 은행 민영화의 주체는 국내 자본이 바람직하다.” (한국은행)

경기를 하다 보면 어느 팀이나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기 마련이다. 이기는 경기에서는 다소 불만족스럽다 해도 눈 감아주는 반면, 지는 경기에서는 불공정한 판정 때문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박빙의 승부라면 양팀 모두 심판 판정 하나 하나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단 한번의 판정 실수가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수 있기에, “심판도 인간일 뿐”이라는 변명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 리 없다. 요즘 국내에서 불 붙고 있는 ‘관치(官治)’ ‘외치(外治)’ 논란이 바로 그 격이다. 외국 자본은 한국 정부가 국내 자본에 특혜를 주는 관치를 일삼고 있다고 공격하고, 토종 자본은 그간 외국 자본에 대한 편파 판정이 지나쳐 외치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외국 자본에 한국시장은 무주공산

외환 위기 이후 외국 자본은 초토화된 한국 시장을 마음껏 유린했다. 제일은행(뉴브리지캐피탈)을 시작으로 외환은행(론스타) 현투증권(푸르덴셜) 제일생명(알리안츠) 등 부실 징후를 보인 금융기관들이 죄다 외국인의 손에 넘어간 것은 물론 대우차(GM), 삼성차(르노) 같은 제조업체도 외국 기업으로 변신했다. 서버러스를 필두로 한 벌처 펀드는 부실 채권을 헐값에 샀다 되파는 방식으로 떼 돈을 벌었고, 파이낸스센터(싱가포르 투자청) 스타타워(론스타) 등 도심의 대형 빌딩도 하얀 머리 주인들을 맞이했다. 먹이를 찾아 나선 외국 자본에게 한국 시장은 무주공산이었다.

외국 자본의 무혈 입성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앵무새처럼 되뇌던 한국 정부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곧 낙후한 금융과 산업을 선진화하는 것이고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주장이었다. 국내 대주주, 특히 토종 산업 자본에 대한 해외의 불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였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급한 구조조정만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라는 대의 명분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었다. 여기엔 “비도덕적인 재벌에 나라 경제를 맡기느니 차라리 제 잇속만 챙기더라도 외국 자본이 낫다”는 여론도 톡톡히 뒷받침을 했다.

부작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들이었다. 거대 기업이 부도 직전의 위기에 처해도 외국 경영진이 들어 앉은 금융기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계산기를 두드려 회사를 살리는 것보다 부도 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이들에게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운운하며 지원 협조를 요청한다는 것은 애초 무리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단기 수익 뿐이었다.

잇따르는 반 외자 전선 움직임

반(反) 외자 전선이 구축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한미은행, LG카드, 한투증권, 대투증권 등 금융권 매물에 외국 자본의 입질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은 해외 자본에 내 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이심전심으로 형성됐다.

구체적인 움직임은 SK(주)의 경영권 다툼 과정에서 표출됐다. 외국계 펀드 소버린이 SK(주)의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SK네트웍스 채권 은행들이 ‘백기사’를 자처하며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를 매입하기로 한 것. “경영권을 소버린이 가져가게 되면 계열사 뿐 아니라 채권단에도 큰 피해가 올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방어하기로 했다”는 것이 채권단의 설명이었다. 채권단의 자사주 인수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계열사, 우리사주 등을 합쳐 34.8%의 우호지분을 확보, 자체 지분 14.99%와 외국인 투자자 지분을 합쳐 20%를 간신히 넘긴 소버린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LG카드 채권단이 LG카드를 채권은행이 인수求?쪽으로 결론지은 것도 비슷한 맥락. LG카드는 씨티은행과 HSBC, GE캐피탈, 뉴브리지캐피탈 등 외국 유수의 금융사들이 눈독을 들였지만, 채권단은 “회원수 1,000만명이 넘는 신용카드사를 외국에 넘기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며 2조원의 자금을 지원한 국내 8개 은행에만 인수권을 줬다. 아예 입찰 단계에서부터 외국 자본의 참여를 차단한 이례적인 조치였다. 비록 입찰이 난항을 겪고 있지만 하나은행, 우리금융 등 여전히 LG카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국내 자본이 적지 않은 데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최후의 보루로 버티고 있어 LG카드의 국내 매각은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자 유치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던 정부가 ‘대항 자본’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나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부는 12월초 경제장관 간담회를 열고 민영화하는 금융 회사를 국내 자본이 인수할 수 있도록 사모펀드 활성화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지금도 사모펀드를 만들 수 있지만 설립 요건이나 투자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라며 “연ㆍ기금, 금융회사, 일반 법인 등의 자본 결합을 통해 대규모 투자 자본의 출현을 유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종 vs 외국 자본 역차별 공방전

심판의 공정성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ㆍ외 자본간 공방도 가열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넷판은 최근 “뉴브리지캐피탈 등 외국 투자자들이 LG카드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금융 장악을 견제하기 위해 채권은행들에게 국내 인수자 물색을 압박하고 있다”며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폐쇄성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FT는 또 “한국 정부는 국내 기업, 특히 금융기관의 해외 매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정책) 조류가 바뀌고 있다는 분명한 조짐이 있다”는 투자은행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외치(外治)의 선봉에 서 왔던 IMF도 외국 자본 차별 분위기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케네스 강 IMF 서울사무소장은 최근 재경부에 서한을 보내 LG카드 등의 입찰에서 외국인 투자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정부 정책에 따른 것인지를 답변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서한에서 “한국 내에서 외국 자본에 대한 차별은 한국 정부의 동북아 금융 허브 추진에 역행하는 것이며, 외국인에게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외국 자본에 같은 입찰 기회를 줘야 하며 그것이 한국의 국가 신인도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기관 매각 시 외국 자본이 포함돼야 선진 금융기법 도입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한국의 금융시장 개방 기조는 지속돼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국내 여론의 저항도 거셌다. 그간 중립성을 견지해 왔던 한국은행은 ‘외국 자본의 은행 산업 진입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외국 자본이 인수한 은행들은 자산 건전성과 경영 투명성이 강화됐으나 기업 대출이 크게 위축되고 수익성도 내국계와 별 차이가 없다”며 국내 자본 육성의 필요성을 이례적으로 역설했다. 한은은 “공적자금을 조기에 회수하기 위해 정부 소유 은행 주식을 서둘러 매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월말 한국금융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도 외국 자본의 국내 금융 시장 지배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 주류를 이뤘다. 주제 발표자인 금융연구원 강종만 선임 연구원은 “외국자본의 국내 은행업 진출은 은행 산업의 경쟁 촉진과 서비스 개선의 이점이 있지만 단기적 이익에 치중한 나머지 독자적 행동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 시스템 리스크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철학이 필요할 때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외국 자본의 유입은 투명성 확보나 선진 기법 도입에 유리하다. 무엇보다 구조조정을 신속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반면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경제적 약자인 중소기업과 서민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토종 자본의 육성을 통해 대항마를 만드는 것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선택을 앞두고 이제 ‘정부의 철학이 필요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토종 자본 육성을 하겠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외자 유치를 허용할 수 있는 한도는 어디까지인지, 또 수용할 수 있는 외국 자본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는 “철학이 빈곤하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외국 자본의 대리인’이라든지 혹은 ‘신(新) 국수주의’라든지 하는 양측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외환 위기 이후 선진 자본의 요구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이제 와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항 자본을 육성하겠다고 하는 것은 철학의 빈곤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주먹구구식으로, 혹은 여론의 등에 떠밀려 정책이 춤을 춘다면 판정의 공정성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4-01-02 18:17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