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인사태풍

엄청난 파장 몰고올 정부와 외국인의 입김
금융계 인사태풍

‘은행장 자리가 하나 비었다. 정부의 한 인사가 낙하산을 타고 은행장 자리에 내려 앉는다. 공석이 생긴 정부 부처의 자리를 향해 차례로 승진 인사가 이뤄진다. 새로운 행장을 맞은 은행은 임원들에 대한 인사를 실시한다. 대대적인 물갈이다. 세대 교체의 바람은 은행권 전체로 확산된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얼마 뒤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 를 떠올리는 것은 다소 무리일까. 어쨌든 “언제쯤 자리가 빌까”라며 학수고대하는 이들이 줄을 서 있는 금융권에서 인사 하나가 때론 엄청난 파급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법이다. 더구나 인사 요인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에 달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2004년 금융계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인사 태풍이다. 자리를 사수하려는 이들과 ‘빈 자리’에 입성하려는 이들, 어떻게 해서든 태풍에 몸을 맡겨 수직 상승해 보려는 이들의 치열한 전쟁터가 될 전망이다. 결과에 따라서는 진짜 폭풍이 될 수도 있다.

위에서 부터 김정태 국민은행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정기홍 전 금감위 부위원장

우리금융 인사가 시발점

올해 금융권 인사 태풍의 핵은 은행권이다. 올해 임기 만료 등으로 공석이 되는 은행장(급) 자리는 무려 12곳이다. 정부가 대주주로 있는 우리금융 윤병철 회장과 전광우ㆍ민유성 부회장, 자회사인 우리은행 이덕훈 행장의 임기가 모두 3월이다. 경남은행 강신철 행장, 광주은행 엄종대 행장, 전북은행 홍성주 행장 등 지방은행장 3명의 임기 역시 3월에 만료된다. 한미은행 하영구 행장과 기업은행 김종창 행장의 임기는 5월이고, 하반기에는 10월말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 12월말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의 임기가 돌아온다. 여기에 행장 직무 대행 체제로 있는 외환은행장 자리까지 포함하면 모두 12명의 은행장 자리가 나는 셈이다.

우선 관심의 초점은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이다. 출범 이후부터 지금까지 경영진내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은 데다 정부 지분 매각을 앞두고 있어 ‘전면 물갈이설’이 힘을 얻고 있다. 출범 초기에는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더니 최근에는 우리카드를 우리은행에서 분사했다가 다시 합병하기로 하는 등 지주회사 스스로 정책 혼선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윤병철 회장이 물러난다는 전제 아래 회장 및 은행장 후보로 외부에서 정기홍 전 금감위 부위원장, 연원영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윤증현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 김종창 기업은행장 등 벌써부터 10여명이 자천, 타천으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 정 전 부위원장은 본인의 활발한 행보와 함께 정부의 물밑 지원까지 받고 있어 우리은행장이 아니라면 기업은행장으로의 이동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변수는 민영화다. ‘이헌재 펀드’가 우리금융 인수에 성공할 경우 시나리오는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측은 “경영진 구성만 한 뒤 물러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전 장관이 우리금융 회장 자리를 상당히 욕심내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이 전 장관이 직접 나서지 않을 경우 ‘이헌재 사단’의 주요 멤버로 꼽히는 김상훈 국민은행 이사회 회장이 전면에 부상하며 재기를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

외환은행장 외국인 영입, 국민ㆍ하나은행장 교체 유력

우리금융과 기업은행 정도를 제외하면 은행장 인사에서 더 이상 정부의 입김이 거의 미치기 힘들다는 점에서 예측이 쉽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완전 민영화가 이뤄지거나 외국계가 장악한 은행들이 대부분인 탓이다.

일단 새 은행장 선임이 목전에 있는 외환은행의 경우 한동안 나돌던 하마평이 최근 들어서는 자취를 감췄다. 론스타의 입성과 함께 은행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초기에는 우병익 한국론스타 사장, 강정원 전 서울은행장, 홍석주 전 조흥은행장 등이 물망에 올랐지만 점차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는 상태다.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의 전례를 좇아 외국인 최고경영자(CEO) 영입이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은행 한 관계자는 “1월 중순 정도 이뤄질 은행장 인사에서 외국인이 영입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며 “현재 이달용 직무대행은 임원막?뭬튼?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예측하기는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금융권의 촉각은 이미 하반기에 있을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김승유 하나은행장의 연임 여부에 쏠려 있다. 이들은 각각 ‘국내 최대 은행의 수장’ ‘최장수, 최고령 시중은행장’으로서 은행권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스타 은행장으로 꼽힌다.

이와 관련, 금융 당국의 한 고위 인사는 “임기 만료되는 행장 중에 연임할 행장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해 교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형국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지난해 초부터 정부와의 갈등설 등이 불거지며 조기 경질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계속된 실적 악화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도 김 행장의 연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김 행장 스스로 “아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임기가 끝나면 물러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연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정부 보유 지분을 자사주로 매입하면서 정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외국인 대주주들의 신뢰도 여전히 두텁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일 욕심이 많은 김 행장이 자사주 매입을 서두른 것이 연임 등을 위한 포석이 아니겠느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1997년 처음 은행장 명함을 찍은 이후 2번의 연임을 통해 8년째 은행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김승유 행장의 경우 그의 은행 내 영향력을 감안할 때 교체된다 하더라도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통해 지주회사 회장직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대주주인 칼라일이 보유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어서 그 결과에 따라 진로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 유관기관장 공석도 잇따라

올해는 금융 유관기관장 자리도 풍년이다. 우선 우리나라의 통화 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7명의 위원 중 5명을 보충해야 한다. 김병일 위원(은행연합회 추천)이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예상치 못한 공석이 생긴 데다, 새로운 한은법으로 증권업협회의 금통위원 추천권이 폐지되면서 최운열 위원이 작년 12월31일부로 중도 하차했다. 또 4월에는 김원태(한은 총재 추천), 남궁훈(대한상공회의소 추천), 이근경 위원(재경부장관 추천)이 임기를 맞는다. 금통위원은 전원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기 4년의 ‘차관급’ 자리로 연봉이 2억원대에 달하는 금융계 최고의 명예직으로 꼽히고 있어 재경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 인사들의 경쟁이 벌써부터 불꽃을 튀기고 있다.

이 중 최운열 위원 자리를 당연직으로 물려받게 되는 이성태 한은 부총재를 제외하고는 섣불리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 단, 한은이 추천권을 갖고 있는 김원태 위원의 후임으로는 박 철 전 부총재(현 고문)가 시중은행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증권분야 기관장들의 임기도 올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지난해 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공기업 물갈이에서 살아 남은 맹정주 증권금융 사장은 이번 임기(6월)에는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 2월과 3월 각각 임기가 끝나는 오호수 증권업협회장과 노훈건 증권예탁원 사장 역시 증시 통합 작업을 추진 중이라는 점이 변수이지만 역시 교체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증권업협회장에는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과 황건호 전 메리츠증권 사장 등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이밖에 윤귀섭 금융결제원장과 김창록 국제금융센터소장은 4월에, 양만기 투신업협회장은 6월에 임기가 만료될 예정. 또 3월 출범하는 주택금융공사 사장 및 부사장 자리를 두고도 전ㆍ현직 재경부 인사와 건교부 및 교육부 인사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양상이어서 치열한 접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4-01-09 14:49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