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 붙은 한자전쟁경제 5단체 '한자 시험' 결의, 취업준비생 당황·한글단체 반발

"한자 모르면 취직도 못해?"
다시 불 붙은 한자전쟁
경제 5단체 '한자 시험' 결의, 취업준비생 당황·한글단체 반발


해묵은 논쟁에 신년 벽두부터 시끄럽다. 벌써 수십년간 되풀이돼온 한자 사용 필요성 논란이다. 불을 당긴 곳은 재계였다.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5단체가 직접 나서서 신입 사원 채용시 한자 시험을 필수로 포함시키기로 결의한 것. 학교 교육의 최대 목표가 취업을 위한 준비로 여겨지는 시대에 재계의 이런 방침이 미칠 파장은 실로 적지 않다. 당장 취업 준비생들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초ㆍ중ㆍ고, 그리고 대학에서조차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이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 말 사용 운동을 적극 펼쳐 온 한글 단체들도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섰다. 다시 불 붙기 시작한 한자(漢字) 전쟁이다.

지난 연말 경제 5단체 부회장들이 회의를 갖고 올해부터 신입사원 채용시 한자시험을 보기로 결정, 한자가 췽버전선의 새로운 복병으로 떠오르게 됐다. 이호재 기자

“중국 때문에” “구시대 유물일 뿐”

전경련, 대한상의, 무협 등 경제5단체는 지난 연말 부회장단 회의를 열고 새해부터 신입사원 채용시 한자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또 소속 회원사들에게도 사원을 채용할 때 한자능력시험을 보도록 적극 권장하고 한자 병기 명함의 사용 운동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기로 했다. 현재 국내 대기업 중에는 SK, 금호아시아나그룹 정도가 입사 시험에 한자를 포함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기업에서 한자 시험이 폐지된 지 오래다.

재계가 내세운 명분은 역시 중국이었다. “젊은 사원들의 한자 실력 저하가 중국, 일본 등 한자 문화권 국가와의 비즈니스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ㆍ중ㆍ일 간 경제 교류의 증가로 한자의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반면 한자 교육 비중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대(對)중국 교류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에서, 또 동북아 경제 혹은 문화권이 주목 받고 있는 현실에서 표의(表意) 문자인 한자의 이해 없이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한글 단체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재계가 중국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걸고 있지만, 실제는 한자 문화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만약 중국과 일본 시장 진출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중국어를, 또 일본어를 제대로 가르쳐야지 중국 사람들도 잘 읽지 못하는 한자를 억지로 외우게 하려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자는 외국어로서의 기능마저 잃은 지 오래다. 오직 사대주의적이고 식민지 유산이 남아있던 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운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한글문화연대는 반박 성명에서 경제5단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단체 김영명 대표는 “젊은 친구들이 영어, 컴퓨터 등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라며 “여기에 한자까지 추가된다면 한자 사교육 열풍이 불어 닥치는 것은 물론 전문 지식이나 인성 교육 등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규황 전경련 전무는 “한자를 알게 되면 일본 책을 70% 이상 읽을 수 있고 중국 글 역시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며 “중국어 교육을 권장하기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한자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라고 반박했다.

한자 세대들의 전방위 공세

재계의 이런 움직임이 아니더라도 최근 들어 ‘한자 세대’들은 이미 전방위로 공세를 펴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한자 사용을 독려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의원 입법으로 국회에 상정된 것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 등 의원 85명은 국회 교육위에 ‘한자교육진흥법안’을 발의했다. 교육부총리 아래 중앙 한자교육심의회를 두고 시ㆍ도 교육감 아래에는 지방 한자심의회를 설치해 한자 교육, 한자 관련 단체 지원, 한자 관련 행사 개최, 한자 교원 양성 등을 지원하자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법안은 또 정부 출연으로 한자교육개발진흥원을 만든 뒤 이 법인이 한자능력검증시험, 교재 개발 등을 맡도록 했다.

서초구 잠원동 동사무소에서 지난해 여름 관내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자교실에서 초등학생들이 한자를 배우고 있다.

우리말글 발전을 위한 국어기본법, 법률 한글화 조치법, 한글날 국경일 추진법 제정 등이 정부와 민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 반대의 내용을 담은 법률이 발의됨으로써 향후 공방은 거세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미 한글학회측은 법안 발의에 대해 “정부가 한자의 일상화를 독려함으로써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는 기존 어문 정책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어 1~2월 중 있을 공청회에서 소모적인 충돌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2005년부터 대학수능시험에 한문이 제2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결정된 것도 한자 교육 열풍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등과 함께 ‘한문1’이 제2외국어 8개 선택 과목 중 하나에 포함되면서 중ㆍ고교에서 애물 취급을 받아 온 한문 수업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 게다가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으면서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한자 교육 붐이 일고 있다. 지난해 한국어문회에서 실시한 한자검증시험에는 매회 전국 20만명의 초등학생이 몰려 인기를 실감케 했으며, 학습지를 통해 한자를 배우는 아이들은 이미 10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등학교 2, 5학년의 두 자녀를 둔 주부 이미숙(36)씨는 “한글전용 세대로서 한자를 몰라 생활에 불편을 많이 겪어 왔다”며 “앞으로 한자 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고 아이들을 일찌감치 서예학원에 보내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한자 교육에 대한 요구가 거세다.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태하 명지대 국문과 교수는 “언젠가 학생들에게 한글과 한자가 혼용된 교재를 읽도록 했더니 ‘습니다’ ‘그리고’ 등의 토씨 정도만 제대로 읽는 수준이었다”며 “국어 능력 향상은 물론 한ㆍ중ㆍ일 3국의 의사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한자 교육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기업들 수용 여부가 관건

지금까지의 논쟁이 정당성, 혹은 당위성에 기댄 양측의 공방에 그쳐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재계가 앞장서 사회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국면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관건은 과연 경제5단체의 권고를 기업들이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있다. 섣부른 예단은 어렵지만 경제5단체가 재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기업들이 권고를 그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예측이다. 특히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이 삼성 출신이고,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두산그룹 회장이라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이번 경제단체의 결정이 급속히 재벌 그룹들의 채용 기준으로 확산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만약 대기업들의 한자 시험이 추세로 자리잡을 경우 그간 정부가 유지해 온 어문 정책의 틀은 완전히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법안을 둘러싼 논쟁 등과 관계 없이 현실이 정책을, 또 법을 주도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 기업의 자율적 결정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한국어문회 박광민 연구위원은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현실에서 기업들이 한자 시험을 보게 되면 교육이 이를 뒤쫓아갈 수밖에 없다”며 “그렇다고 한자 공부를 사교육의 몫으로 남겨 둔다면 공교육 붕괴를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4-01-09 15:09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