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아이디어 상품들, 새로운 소비시장 형성로봇 청소기·말로 작동하는 오디오·통합 리모콘 등 인기

귀차니스트 마케팅 성황, 꼼짝하지 않아도 "Good Life"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아이디어 상품들, 새로운 소비시장 형성
로봇 청소기·말로 작동하는 오디오·통합 리모콘 등 인기


‘알약 하나로 끼니를 때울 순 없을까?’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어린 시절에도 의식주 자체를 이처럼 간단하고 간편하게 만들어주는 요술(?) 상품의 등장을 꿈꾼 적이 있었다. 문명의 발달과 첨단 기기의 등장으로 생활 전반이 10년 전, 아니 1~2년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편리해졌건만 아직도 모자란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들이다. 귀찮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혼자 생활하는 데 익숙한 이들을 가리켜 ‘귀차니스트’라고 부른다.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일상의 수고로움조차 극도로 꺼리는 게으름뱅이, 즉 귀차니스트를 위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귀차니스트가 소비시장의 새로운 코드로 등장한 것이다.


- 청소하는 하인, 알아서 척척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이선영(30)씨는 요즘 혼자 사는 집에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지난해 생일 선물로 부모가 보내준 로봇 청소기 때문. 전원만 켜주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먼지 등을 알아서 ‘척척’ 치워준다. 장애물이 많아도 OK. 센서가 사물을 감지해 장애물을 피해 다니면서 구석구석 닦아준다. 전원이 부족하거나 청소가 끝나면 스스로 충전기쪽으로 자동 복귀한다.

“퇴근 시간에 맞춰 청소를 예약해 두면 깨끗하게 치워진 집에 들어갈 수 있어요. 아침에 바삐 머리 감고 말리면서 여기저기 흩날린 머리카락이나 먼지 등이 없어져 있으니 기분이 상쾌하죠. 생긴 것도 귀엽고, 저 대신 청소하는 하인을 둔 것 같아 흐뭇해요.”

이 제품은 지난해 LG전자가 로봇 가전의 최강자가 되겠다는 뜻을 담아 야심차게 선보인 ‘로보킹’(ROBOKING). 가사지원 개인용 로봇은 소비자 가격이 200만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상품임에도 LG나 삼성, 일렉트로룩스코리아 같은 대기업에서부터 우리기술 등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향후 급성장 품목으로 보고 업 그레이드 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렉트로룩스코리아의 ‘트릴로바이트’는 지난해 1월 출시된 이후 판매량이 하반기 들어 상반기 대비 월평균 20% 이상 늘었다.

로봇 전문 벤처기업인 유진로보틱스는 오는 4월 실생활용 홈로봇 ‘아이로비’를 선보일 예정이다. 일정을 관리하고,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거나 영어 학습을 시켜줄 수 있는 교육 기능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외부 침입자를 감시하고 원격지에서 인터넷을 통해 집안의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범 기능도 갖췄다.

고가 제품만 있는 게 아니다. 40만원대 청소기 ‘룸바’(미국 아이로봇사 제품), 60만원대 청소기 ‘아이작’(우리기술) 등 저렴한 가격의 홈 로봇이 최근 선을 보였다. 미국 액티버티 미디어 리서치에 의하면 개인용 로봇 시장은 향후 5년간 수량 면에서 3,500%, 금액 면에서 2,500%의 성장이 예상된다. ‘귀차니스트’ 상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로봇이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잡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로봇 외에도 전자업계는 사용의 편리성을 크게 강화한 제품이나 소비자의 동선을 줄여주는 제품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냉장고, 카메라, 리모콘 등 상품군도 다양하다.

- 말만해도 카메라 셔터가 '저절로'

니콘 카메라를 수입 판매하는 아남옵틱스는 지난해말 소리를 인식하는 기능의 컴팩트 디지털 카메라 ‘니콘 쿨픽스 시리즈 E3700’ 를 내놨다.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 말만 해도 사진이 찍힌다. 140g의 앙증맞은 초소형 제품이라 휴대도 간편하다.

JVC코리아는 손뼉만 한 번 쳐주면 알아서 최적의 사운드 환경을 만들어주는 ‘오토매틱 셋업’ 기능을 내장한 홈시어터를 선보였다. 역시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귀차니스트를 겨냥한 상품이다.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기 전에 손뼉을 쳐주면 스피커와 관람석과의 거리 등 관람 환경이 자동으로 계산돼 가장 적합한 사운드 환경을 제공한다고 한다.

혼합형 제품도 인기다. 일산에 사는 김석준(33)씨는 얼마 전 리모콘을 새로 샀다. TV, 비디오, 에어컨, 캠코더 등 제품마다 일일이 달려 있는 찾아 조정하는 게 번거롭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리모콘이 여러 개 있으면 헷갈리기만 하잖아요. 이 모든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제품으로 바꿨어요”라고 말했다. 간단한 것 같지만 통합 리모콘은 귀차니스트에게 필수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출시한 통합 리모콘은 17개의 자사 및 타사 제품 제어가 가능하고, 소니코리아의 통합 리모콘은 18개의 리모콘 기능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외에 빵을 구우면서 우유도 데울 수 있는 복합형 전자레인지, 삶는 세탁기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하나로 모아 단순하게 조작할 수 있는 ‘퓨전’ 상품도 인기 있는 품목이다.

식탁 위에 여러 번 오르내리는 반찬들을 손쉽게 저장할 수 있도록 반찬 냉장고도 식탁으로 내려왔다. 밥 먹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반찬 그릇을 꺼내고 넣을 수 있다. 2001년 5월부터 OEM방식으로 반찬 냉장고를 판매해 온 대우 일렉트로닉스 영업기획팀 박창훈 차장은 “벽걸이 식기 건조기를 대체할 제품으로 반찬 냉장고가 부상하면서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내년 판매분 선주문 예약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간편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는 ‘귀차니스트’ 바람은 인터넷 쇼핑몰에도 번지고 있다. 전자상거래 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 등에 올라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제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슬리퍼를 신고 바닥을 문지르듯 다니는 것만으로 바닥 청소를 해결할 수 있는 ‘슬리퍼형 걸레’, 치약 뚜껑을 두 손으로 열기도 귀찮을 때 한 손으로 간단하게 열 수 있는 ‘아이디어 캡’ 등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귀찮아도 여성들에게 피부관리는 피할 수 없는 일. 바르고 말린 뒤 닦아내야 하는 기존 화장용 팩 대신 그대로 얼굴에 붙이고 자면 피부가 촉촉해지는 ‘마스크 팩’과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운데이션, 자외선 차단제 등을 한꺼번에 통합해 빠른 화장을 돕는 간편한 ‘메이크업 블록’도 인기다.

- "주부 겨냥한 상품 출시 다양화 될 것"

조리할 때도 간편한 기구가 필수다. 도마와 칼, 밀폐형 보관 용기가 하나로 되어 있어 김치를 손에 묻히지 않고 손쉽게 자를 수 있는 ‘김치 자르미’라든지, 음식 재료를 넣어 놓고 전원을 켜고 기다리기만 하면 젓지 않아도 요리가 되는 일명 ‘요술냄비’ 등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방바닥을 뒹굴고 다니는 이들이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할 리도 없다. 그래서 데워만 먹는 즉석 식품과 반조리 식품이 환영 받는다. 쇼핑몰 옥션에서 즉석 죽을 판매하는 ‘쿨앤쿨’에선 죽만 한달에 4,000만원어치씩 팔려나갈 정도다. 옥션의 배동철 이사는 “마우스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귀차니스트들이 늘면서 이들이 겨냥한 아이디어 상품들의 종류가 앞으로 더욱 다양화될 것”라고 전망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3-10 22:02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