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회복은커녕 중태 임박?국제수지·산업활동 동향 겉으론 우등, 내용상 수출 의존도 심각소비·투자 양대 부문 여전히 꽁꽁, 구조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

한국경제 엄습한 ‘더블 딥’ 논란
경기 회복은커녕 중태 임박?
국제수지·산업활동 동향 겉으론 우등, 내용상 수출 의존도 심각
소비·투자 양대 부문 여전히 꽁꽁, 구조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


부산 감만 부두에서 수출화물이 컨테이너에 선적되고 있다.

경기 침체기에 기업들이 생산을 늘린다고 해 보자. 판단의 착오였을 수도 있고, ‘위기가 기회’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생산이 늘어나니 일시적으로 경기는 회복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산을 늘려도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다. 생산 효과는 금세 사라지고 경기는 다시 하락 국면에 접어든다. 요즘 한창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른바 ‘더블 딥(double dip)’ 상황이다. 추락하던 경기가 상승하는가 싶더니 다시 수렁에 빠진다는 얘기다.

과잉 생산의 후유증까지 안고 있으니, 첫 번째 침체보다 두 번째 침체는 더욱 악성일 수밖에 없다. ‘더블 딥’이 무서운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의 경기 상황을 두고 ‘더블 딥’이니, 그렇지 않느니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것도 이런 심각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과연 2004년 7월 한국은 경기 사이클의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일부 전문가들의 경고처럼 ‘제2의 위기’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 ‘수출 외끌이’에 체감 경기 바닥

최근 발표되고 있는 경기 지표만 보면 ‘더블 딥’ 논란이 도대체 왜 제기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만도 하다. 한국은행이 6월 말 발표한 ‘5월 국제수지 동향’. 5월 한달간 경상수지 흑자는 37억6,000만 달러에 달했다. 1998년 9월 38억7,000만 달러를 기록한 이후 5년 8개월 만에 최대치였다. 한은 관계자는 “6월의 수출 동향을 보면 6월에도 경상수지가 30억 달러 이상 흑자를 내 올 상반기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이 14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내놓았던 올해 경상수지 흑자 전망치가 60억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미 상반기에만 갑절을 훨씬 넘어서는 ‘호황’을 누린 셈이다. 한은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 전망치를 60억 달러에서 4월 150억 달러로, 그리고 7월에 다시 220억 달러로 수정했다.

통계청의 ‘5월 산업활동 동향’도 우리 경제가 쾌속 행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5월 산업생산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13.5%. 2개월 연속 두자릿수 증가세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우울하기 그지 없다. 수출, 투자, 소비 등 경제를 이끄는 세가지 축 중에서 오직 수출만이 지표를 견인하고 있다. 주요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영상음향통신을 제외할 경우 5월 산업생산 증가율은 10%포인트나 추락한 3.5%에 그친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심각한 수출 의존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국ㆍ영ㆍ수 3과목 중에서 국어는 100점을, 나머지 두 과목은 70점을 맞았다고 했을 때 평균 점수는 80점이 되는 것이니 그 정도면 괜찮은 것이 아니냐.”

하지만 전문가들은 수출의 경기 부양 효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수출 →투자 →고용 →소비’의 선순환 고리가 차단됐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휴대폰, 반도체 등 주요 수출품의 경우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아무리 수출이 증가해도 국내에서 고용 효과나 생산 확대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휴대폰의 경우 핵심 부품인 모뎀 칩은 거의 전량 수입하고 있고, 플래쉬메모리 배터리 등 나머지 부품도 30~40% 가량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경기를 지탱해 온 수출이 하반기부터는 서서히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기술(IT) 제품에 의존도가 높아진 수출 구조 아래에서 반도체와 LCD 등의 가격 사이클이 하락세로 치닫게 될 경우, 오히려 수출이 경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 ‘저투자-저소비 구조’ 고착화하나

‘수출 외끌이 경제’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는 정부도 충분히 인식을 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일각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정부 당국자들이 입버릇처럼 늘 되풀이하던 말이 있다. “그래도 하반기부터는 투자와 소비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낙관적 기대도 하반기에 접諍勇庸?점차 힘을 잃어가는 분위穗? 기업들은 ‘대통령과의 간담회’ 이후 하반기 투자 계획을 잇따라 발표했음에도 입 발림에 불과할 뿐, 여전히 벌어들인 돈을 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차곡차곡 쌓아두고만 있다. 국민들 역시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저축만 늘려가고 있을 뿐 좀처럼 소비 심리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연착륙 대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경기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고, 소비의 근간이 되는 고용마저 최근 회복세가 둔화하는 모습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저투자- 저소비’ 구조가 단순히 경기적인 요인이 아니라 한국적인 특수 상황 속에서 장기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서서히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재계 인사들은 틈만 나면 “투자 환경을 조성해 달라”며 정부를 향해 압박을 가한다. 규제 완화, 법인세 인하 등의 조치가 없으면 더 이상 한국 땅에 투자를 늘리는 것이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소의 엄살이 섞인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중국 등지로의 생산 공장 이전이 급속히 진행되며 ‘제조업 공동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에서 저투자에 따른 저고용 상황이 뿌리 깊게 자리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경기가 다소 좋아진다 해도 예전처럼 소비의 활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정년 단축에 따른 고용 불안, 급속히 진전되는 고령화 사회, 노후 사회복지망 부족 등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경제 현실에서 소비자들이 쉽게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지훈 수석연구원은 “신용불량자나 가계 부채 문제는 현재 소비 부진을 설명할 수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며 “청년 실업, 물가 상승, 부동산과 주식 시장 침체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어 소비심리 회복은 상당히 요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일부 전문가 ‘L자형’ 장기 불황 우려도

최근 ‘더블 딥’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LG경제연구원이었다. 이 연구원은 ‘경기회복세 다시 꺾이나’라는 보고서에서 우리 경제가 내년 1분기 수출 주도 경기 회복의 정점을 찍은 뒤 다시 하강해 ‘더블 딥’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우리 경제가 회복다운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 내년부터 다시 하강하면 2003년초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가 3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 침체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일부 전문가들은 ‘저투자 – 저소비’ 구조가 고착화한다면, ‘더블 딥’ 보다도 더 심각한 ‘L자형’ 장기 불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까지도 제기한다. ‘더블 딥’은 경기가 ‘W자형’으로 두번 침체 후 다시 상승 국면에 올라설 수 있지만, ‘L자형’은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훼손돼 언젠가의 상승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에 대해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고 일축한다. 재정경제부는 최근 ‘국정 브리핑’을 통해 “경기 동행ㆍ선행 지수가 두달 째 하락했다는 것만 가지고 경기가 하락 국면으로 꺾였다고 판단할 수 없다”며 “정확한 추세 전환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6개월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우리 경제가 ‘회복 국면’에 있다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이미 손을 쓸래야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려 있을 지도 모른다. 경기 상황에 대한 판단 지연이, 혹은 판단 착오가 얼마나 큰 화를 부를 수 있는지, 우리는 외환 위기로 이미 뼈 저린 경험을 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4-07-15 11:49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