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단계 확대시행 앞두고 보험업계·은행권 '일전불사' 대립

방카슈랑스 밥그릇 싸움
2단계 확대시행 앞두고 보험업계·은행권 '일전불사' 대립

“요즘 ‘떼법’이라는 말이 있어요. 떼만 쓰면 법도 마음대로 고치고 만들고 하는 세상이니….”

최근 은행권과 보험업계가 내년 4월로 예정된 방카슈랑스(은행 창구를 통한 보험 판매) 2단계 확대 시행을 둘러싸고 ‘연기는 있을 수 없다’(은행), ‘연기해야 한다’(보험)며 서로 으르렁대고 있는 모습에 한 금융연구소 관계자가 혀를 차며 내뱉은 말이다. 일단 밀어붙이고 보자는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을 꼬집은 것이다.

이 관계자뿐만 아니라 지금 대다수 소비자들은 은행권과 보험업계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고 당기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인지, 또 금융 당국은 왜 ‘판정’을 서두르지 않는지 헷갈리기만 하는 것이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둘 다 그럴 듯하다. 먼저 연기를 주장하는 보험업계의 주장.


- 보험업계 "은행만 배불리는 제도"

손해보험협회 노조에 따르면 방카슈랑스 제도가 소비자 편의와 보험료 인하, 보험사의 새로운 판매 채널 확보, 은행의 새로운 수입원 창출이라는 ‘윈-윈-윈’ 차원에서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은행의 배만 불렸을 뿐 보험사와 소비자에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노조는 또 방카슈랑스가 오히려 불완전 보험 판매와 대출시 보험 꺾기, 과다 수수료 요구 등 문제만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 11개 보험회사 및 9개 은행대리점을 대상으로 방카슈랑스 운영 실태를 점검한 결과, 은행의 교섭력 우위에 따른 불공정한 제휴 계약과 은행 창구직원의 업무 미숙으로 인한 불완전 보험 판매가 어느 정도 드러난 바 있다. 게다가 방카슈랑스는 도입 6개월 만에 판매가 허용된 보험상품 시장의 65% 가량을 차지, 은행권에는 짭짤한 모집 수수료를 안겨준 반면 보험업계에는 별다른 수익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보험업계의 주장이다.

보험업계의 ‘연기론’은 사실 방카슈랑스 1년의 과오보다는 확대 시행 이후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 은행권 영업망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한 터라 자동차보험과 보장성 보험까지 판매 범위가 확대되는 2단계 방카슈랑스가 그대로 시행되면 업계에 ‘재난’이 닥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손해보험업계의 경우 자동차보험이 전체 매출의 절반에 가까운 형편인데, 이를 은행에 개방하면 중소형 회사들은 살아 남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연쇄적으로 보험 모집인들이 대량 실업 사태에 내몰려 사회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손해보험업계 내부의 입장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업계 상위 손보사의 한 관계자는 “사실 방카슈랑스 2단계가 시행되더라도 큰 회사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다고 본다. 은행을 통해 팔든 직접 팔든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보험업계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영업 조직에 상당히 의존하는 사업 속성상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보험업계가 밖으로는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을 연기해야 한다며 한껏 목청을 돋우고 있지만 안에선 각자의 득실을 따지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셈이다.

보장성 보험 상품을 주력으로 하는 생명보험업계도 방카슈랑스 2단계 확대 시행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다. 생명보험 가구 가입률이 90%에 이를 정도로 포화 상태에 도달한 시장에 은행이 들어오면 밀려나는 쪽은 결국 힘 없는 설계사들이라는 것이다. 보장성 보험 상품은 저축성 상품과 달리 설계사들의 수입 가운데 70%를 차지하는 주소득원이다.

생명보험업계는 또한 대형 생보사와 은행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면 중소 생보사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형 생보사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너댓 군데의 중소 생보사들이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며 “예정대로 방카슈랑스 2단계를 밀고 간다면 작은 회사 한두 개가 먼저 무너진 다음 다른 회사들에 여파가 도미노처럼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험업계에서는 정부의 금융 정책이 은행만 키우는 쪽으로 쏠려 있다고 볼멘 소리를 내놓기도 한다. 정부가 IMF 이후 은행 구조조정 등을 통해 은행의 대형화를 촉진했고 이 와중에 제2금융권은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방카슈랑스 제도를 서둘러 확대하는 것 역시 은행 편들기의 단적인 사례라는 주장도 나온다.


- 은행권 "대내외 신뢰도 고려, 계획대로"

이처럼 보험업계가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에 부정적인 견해를 쏟아내고 있지만 은행권의 입장은 단호하다. 한마디로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은행연합회 강봉희 상무는 8월 26일 기자 간담회에서 “제도 도입시 논의된 기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데다 정책의 일관성, 대내외 신뢰도를 고려할 때 2단계 방카슈랑스는 계획대로 시행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강 상무는 또 은행들이 2단계에 대비해 이미 각종 투자를 하고 있는 점도 연기 불가의 중요한 사유로 들었다. 보험업계가 집요하게 공격했던 방카슈랑스 1단계 시행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당국의 감독 기능으로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은행권과 보험업계가 이처럼 일전불사의 대결을 벌이고 있지만 중재자인 정책 당국은 쉽사리 끼어들지 않고 있다. 다만 이헌재 재경부 장관이 “예정대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원론적인 견해를 밝혔을 뿐이다. 정부의 모호한 대응은 보험업계가 주장하는 현실적 문제들과 은행권이 주장하는 제도 시행의 원칙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기 위한 시간 벌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유·불리 불투명, 일부선 전문성 강화에 주력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보험업계가 방카슈랑스 문제에 대해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보장성 상품이 은행을 통해 판매되더라도 시장 잠식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 “보장성 상품은 설계가 까다로운 만큼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며 “어떤 소비자가 비전문가인 은행 창구 직원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안심하고 맡기겠는가”라고 말했다.

‘합리적인 소비자’들은 은행이 판매하는 보장성 보험 상품의 편의성, 가격 경쟁력 등만 보고 가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점을 간파한 때문인지 외국계 생보사들은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에 대비해 설계사들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하는 교육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말하듯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지는 이번 ‘방카슈랑스 대전’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 아직은 미지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금 사태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09-02 15:03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