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구본무 회장 양자입양으로 관심 증폭, 지분이양·경영수업 현재 진행형

재벌가 후계구도 다지기 '정중동'
LG구본무 회장 양자입양으로 관심 증폭, 지분이양·경영수업 현재 진행형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지난달 양자를 들였다는 소식이 최근 알려지자 재계 호사가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그 배경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재벌 가문의 가족사(事)란 본디 보통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할 뿐더러, 조카를 아들로 삼았다는 스토리 자체는 매우 이채롭기까지 하다.

LG그룹은 7일 구 회장이 바로 아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 광모씨(26)를 양자로 호적에 올렸다고 공식 발표했다. LG측에 따르면 이번 일은 집안의 어른인 구자경 LG 명예회장(구 회장의 아버지)이 참석한 11월 가족회의에서 결정됐다. LG그룹 관계자는 “구 회장은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지만 아들이 없는 상황”이라며 “집안의 대소사에는 아들이 필요하고 또한 장자(長子)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사실 LG그룹은 자손이 많기로 소문난 재벌 가문이다. 창업 동지인 허씨 가문이 GS그룹으로 분리해 나가기 전만 하더라도, 구씨와 허씨 두 일가로 구성된 그룹 오너 집안은 사람들로 넘쳐 났다. 구씨와 허씨 성의 주요 주주가 빼곡한 계열사 지분 분포도를 살펴보면 집안의 다복함을 쉽사리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지만, 집안 간이나 형제 간의 잡음이 외부로 알려진 적이 없을 만큼 화목을 자랑해 온 것도 LG그룹의 특징이다. 재계에서는 두 가문의 확실한 역할 분담과 함께, 가족 간에도 본분과 질서를 중시하는 LG 특유의 끈끈한 유교적 가풍을 그 배경으로 들곤 했다.

LG 구씨家 두 번째 교통정리

이런 점을 감안하면 LG그룹의 이번 결정이 아주 이례적인 일은 아닌 셈이다. 과거 유교 사회에서는 조카를 입양해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계는 그러나 이번 LG그룹의 결정을 단순히 장자의 대를 잇기 위한 것만으로 보지는 않는 분위기다. 구본무 회장 이후를 미리 대비하자는 뜻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구 회장이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은 그룹의 대통을 누구에게 넘기느냐 하는 문제와 별개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LG그룹의 대권을 장자인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주면서 일찌감치 나머지 세 아들의 영역을 ‘교통 정리’한 바 있다. 그의 구도에 따라 둘째 아들 본능씨는 희성그룹 회장, 셋째 아들 본준씨는 LG필립스LCD 부회장, 넷째 아들 본식씨는 희성전자 사장을 현재 맡고 있다. 차남의 아들을 집안의 장손으로 세운 이번 결정도 따지고 보면 후계 문제와 관련한 잡음을 막기 위한 구 명예회장의 두 번째 교통 정리인 셈이다.

재벌 그룹들에게 후계 문제는 항상 뜨거운 감자다. 2000년 현대가(家)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은 아들이 많은 재벌 오너에게 후계자 선정이 얼마나 난감한 작업인지 잘 나타낸 대표적 사례다. 게다가 요즘엔 후계자를 정했다 하더라도 경영권을 물려주기까지는 간단치 않은 장애를 넘어야 한다. 재벌들의 황제식 경영이 당연시되던 과거에는 오너가 자신의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데 대해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려웠지만, 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진 근래에는 반대로 시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재벌들은 이제 후계자에 대한 경영권 이양을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대개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친위 세력이 대신 챙기는 경영권 이양 작업은 지분 이전과 경영 수업의 두 갈래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재용·정의선·신동빈 등 행보에 주목
국내 10대 재벌(시가 총액 기준) 가운데 후계자에 대한 지분 이전과 경영 수업 두 가지 모두 가장 잘 이뤄지는 곳은 삼성그룹이라는 평이다. 온라인 경제매거진 ‘에퀴터블’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36)의 후계 체제를 이미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 상무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서 계열사 지배의 토대를 쌓은 데다, 삼성전자와 일본 소니의 합작회사인 S-LCD 등기이사로 본격적인 경영 일선에 나선 상황이다. 또한 이건희 회장이 주재하는 각종 회의나 현장 활동을 자주 수행하며 아버지의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상무의 경우와 달리 지분 이전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경영 일선에서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는 사례는 많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후계자로 공인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10대 재벌 안에서는 현대ㆍ기아차그룹의 정의선 부사장(34), 롯데그룹의 신동빈 부회장(49), 한진그룹의 조원태 차장(28) 등의 행보가 후계 구도와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정몽구 현대ㆍ기아차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정 부사장은 지난 가을 슬로바키아 현지 공장 설립이 부지 매입 문제로 난관에 봉착하자, 직접 슬로바키아로 날아가 고위 정부 인사와 담판을 짓는 등 이미 그룹 경영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평가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의 최근 움직임도 관심사다. 장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그룹 부사장에게 일본 쪽 사업을,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에게 한국 쪽 사업을 맡긴다는 신 회장의 후계 구상은 벌써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신동빈 부회장의 그룹 내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 10월 신설된 경영정책본부(그룹 구조조정본부에 해당) 본부장으로 임명됐는데, 이는 한국 롯데그룹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란 게 재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진그룹의 소규모 계열사인 한진정보통신에서 근무하다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경영전략본부로 최근 입성한 조원태 차장도 시선을 끌고 있다. 조양호 회장의 외아들인 조 차장은 경영전략본부 기획팀에서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을 것으로 재계는 전망하고 있다.

이밖에 10대 이하 재벌 중에서는 하이트맥주, 농심, 동원, 현대산업개발, 한솔 등이 후계 구도를 탄탄히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많은 중견 재벌들이 경영권 이양을 가속화하기 위해 올 들어 지분 이전에 속도를 부쩍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속ㆍ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 시행에 따라 일시에 많은 지분을 옮기기에는 상당한 세부담이 생긴 때문이라는 게 조세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앞으로 재벌들의 ‘물밑 후계 작업’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그래서 나온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12-17 11:08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