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한·일 경제인 회의양국 경제계 거물들, 냉정한 자세로 우호·협력 증진 강조

엉킨 한일관계, 재계가 푼다
제37회 한·일 경제인 회의
양국 경제계 거물들, 냉정한 자세로 우호·협력 증진 강조


독도 및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로 한일 양국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지만 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는 제37회 한일·일한 경제인회의가 열려 양국의 경제발전 협력을 모색했다. (오른쪽부터) 박태준 한일경제인협회 명예회장, 조석래 한국 측 회장,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세토 유조 일본 측 단장. 이호재 기자

독도 영유권과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ㆍ일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양국 경제계 인사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였다. 4월 14~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 37차 한ㆍ일 경제인회의에서 양국 경제계 거물들은 냉각된 한ㆍ일 관계를 경제 협력을 통해 풀어 나가자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서로에게 손해가 될 뿐인 양국의 불편한 관계를 재계가 앞장 서 풀어내자'는 것이 요지였다.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측 인사들은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감정적 대응에 대한 쓴 소리부터 쏟아냈다. 감정만 앞세우다 실속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경제협회 회장인 조석래 효성 회장은 개회 인사에서 "우리가 과거에 사로잡혀 너무 감성적으로 문제를 대하는 측면이 있다"며 "참다운 성과를 이루려면 냉철한 이성으로 사실에 입각해서 옳고 그른 것을 밝히면서 흉금을 털어 놓고 실속을 이야기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조강연에 나선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경제 외적인 요인으로 우호적 한ㆍ일 관계에 악영향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양국간 경제협력을 강조했다.

공노명 전 외무부 장관은 전체회의 주제발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격앙된 우리 국민 가운데 일부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강경 대응하는 것만이 애국적 행동인 줄 착각하고 있다"며 우리 국민의 지나친 반일 감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특히 "경상북도의 시마네현 자매결연 중단이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볼 대목"이라며 "한ㆍ일 동맹의 자산을 실속 없이 내팽개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본측 대표들은 발언에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양국간 관계 악화만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한경제협회 회장인 세토 유조(瀨戶雄三) 아사히맥주 상담역은 "최근 양국 관계가 역사 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양호한 상황이 아니다"며 "그러나 양국간 협력의 싹을 뽑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토 회장은 최근 한ㆍ일 고교생 교류 캠프에 참가했던 한 학생의 감상문을 소개하면서 우회적으로 입장을 표명해 눈길을 끌었다. 감상문의 요지는 '하나의 나라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국가 전체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교류캠프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세토 회장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좋은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며 "돌아가면 일본 정치계에 한국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ㆍ일 경제협력의 산 증인인 오쿠다 히로시(奧田碩ㆍ도요타 회장) 일본 게이단렌 회장도 "글로벌화 추세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라도 양국 경제인들은 정부, 학계와 협력해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될 수 있도록 협조하고 각국의 국내 문제 조율에 힘 쓸 필요가 있다"며 경제계 역할론을 주창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민감한 내용은 빠졌다. 노 대통령은 "양국 관계가 올바른 협력관계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와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경제분야의 교류와 협력이 한ㆍ일 관계의 탄탄한 기반이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도 두 나라의 현안에 대한 언급 없이 "미래 지향적인 한ㆍ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더 많이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측에서는 박태준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유상부 포스코 고문 등 130여명이 참석했고, 일본측에서는 사메시마 후미오(鮫島章男) 태평양 시멘트 사장 등 120여명이 참가했다.

독도는 독도, 경제는 경제?
장병욱 차장

안중근 의사가 단지(斷指)의 비원을 담아 썼던 ‘독립(獨立)’이라는 한자의 필묵이 순국 95년 만에 한국에 온다. 그 같은 소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역사는 그렇게 살아 남은 자들을 다그친다. 점령국의 패전으로 주어진 해방이 온전치 못 했던 것처럼, 돈 몇 푼이 아쉬워 수 많은 반대 속에 국교를 수립했던 것처럼,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 심해에 묻힌 하이드레이트보다 더 깊은 암흑이 가로 놓여 있다.

서른 일곱번째를 맞는 4월 14일의 한일ㆍ일한 경제인회에 참석했던 양국 대표들은 저간의 사정은 일단 접어 둔 채 두 나라 기업간의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경제 교류 활성화로 악화일로에 있는 두 나라간의 관계를 잘 풀어 보자고 입을 모았다. 반일(反日)과 염한(厭韓) 상황이 만들어 낸 살얼음판 아래로, 두 나라 경제인들은 1965년 이래 열심히 주판알을 굴려 왔다.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이 이번 행사를 빌어 소망한대로 그것은 과연 윈윈 게임이었을까.

출발점은 1965년 박정희 정부가 맺은 대일 관계 정상화 조치, 즉 한일협정이다. 그 중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은 양국간의 예민한 현안인 식민지 시대의 보상ㆍ배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5억 달러(무상 원조 3억, 차관 2억)의 대일 청구권 자금은 징용 한국인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흘러 들어 갔고, 그나마 뒤늦은 1970년대에 군인 군속 사망자 8,000여명에 대한 제한적 보상에 그쳤을 뿐이다.

비록 최근의 TV 드라마 ‘겨울 연가’가 배용준 등의 일본 활동 등으로 일본에서만 1,225억엔 상당의 경제 파급 효과를 창출했고 촬영지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급증했다고 하나,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크게 본다면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일본측에서 받은 ‘경제 협력 자금’으로 드리워진 숙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 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일본과의 무역으로 초래된 적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돼 1965년 1억22백만 달러, 1985년 30억 달러, 2001년 101억 달러, 2002년 147억 달러, 2003년 190억 달러 등으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대일 무역 적자가 부풀어 가는 데에는 한국의 전체 수출 규모가 증가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 휴대 전화, LCD 등의 제조 장비와 핵심 부품을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까닭이다. 한국 경제가 일본으로부터 부품 소재를 수입해 세계 시장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구조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아직까지 많은 차이가 나는 핵심 기술 수준 등 구조적 요인이 해묵은 숙제다. 여기에다 중국 상품의 일본 진출이 증가하면서 일본에의 주력 수출 상품이 경쟁력을 잃어 가는 데다 관세까지 철폐되면서 가격과 품질면에서 앞서가는 일본 제품들이 쇄도, 한국의 부품ㆍ소재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또 FTA가 대일 무역 적조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가격과 품질면에서 우세한 일본 제품들이 쏟아져 들어 올 경우 우리의 부품ㆍ소재 산업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이 혁명의 영감에 사로잡혀 했던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주장한다. “독도는 독도, 경제는 경제”라고. 과연 그럴지, 이 시대가 맞닥뜨린 하나의 딜레마다.

유병률기자


입력시간 : 2005-04-21 16:55


유병률기자 bryu@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