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상품…鄕愁를 판다라면·음료 등 먹거리에서 자동차까지, 불황 극복 키워드로 등장

추억을 부르는 '복고 마케팅'
그 시절 그 상품…鄕愁를 판다
라면·음료 등 먹거리에서 자동차까지, 불황 극복 키워드로 등장


기억 속에서나 아련하게 남아 있던 ‘추억의 상품’들이 세상으로 속속 재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노스탤지어(향수) 마케팅’, ‘추억 마케팅’ 등으로 불리는 ‘복고 마케팅’에 따른 것으로, 이 기법은 업계들이 불황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잡을 조짐이다.

옛 상품으로 옛 명예 되찾기
라면을 즐겨먹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라면에서 부는 복고바람을 느낄 수 있다. 1975년 출시돼 우지사건으로 생산이 중단되기까지 15년간 6억개가 팔렸던 ‘농심라면’이 오는 5월에 재생산될 예정이다. ‘농심라면’은 ‘왈순마’(1968), ‘시락면’(1974), ‘브이라면’(1981), ‘까만소라면’(1985), ‘느타리라면’(1989) 등 60~80년대에 시판됐던 6개의 제품 중 소비자들이 다시 먹고 싶어하는 라면 인기 투표에서 16만 표(전체 43만 표)를 얻어 1위를 차지한 라면이다. 창립 40주년을 맞아 ‘그 라면을 돌려주마’라는 주제로 열린 라면 대축제를 통해서였다. 농심은 이번 행사를 통해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청소년층에게는 호기심을 유발시켜 위축된 라면시장의 소비를 진작시킨다’는 전략이다.

롯데칠성음료가 1990년대 초에 내놓았던 오렌지 주스 ‘따봉주스’도 이 같은 바람을 타고 재출시 됐다. 실제 ‘따봉 주스’는 ‘델몬트 오렌지 주스’의 후속물.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 중 브라질편에서 오렌지 품질 검사관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따봉’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소비자들에게 ‘델몬트 오렌지 주스’보다 더 크게 각인돼 인기를 끌자, 이 ‘따봉’의 인기를 다시 판매로 연결 짓기 위해 내 놓은 상품이다. 하지만 최근에 재출시된 ‘따봉 주스’는 저가 제품 소비경향에 발맞춰 초저가인 저과즙(5%~15%) 컨셉트로 나왔다. 그 내용물이야 어떻든, 엄지손가락을 들고 ‘따봉’을 외쳐 본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상황이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제품 이름 하나를 알려서 소비자들이 인지하도록 하는 데만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면서 “옛 이름과 모양을 딴 제품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 만큼 업계가 겪는 불황의 터널이 어둡고 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동차 시장도 불황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복고 마케팅은 요즘 출시되는 신차들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복고바람 드센 자동차 시장
최근에 출시된 프라이드가 대표적인 경우다. 리오의 후속으로 개발됐지만, 서울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1987)에 출시돼 13년 동안 150여만대(국내 70만대)가 팔리며 ‘잔고장이 없는 차’ , ‘경제적인 차’, ‘안전한 차’ 등 국민의 자동차로 인기를 끌었던 ‘프라이드’의 이름을 달고 출시됐다. 옛 프라이드 보다 배기량과 실내공간이 모두 커진 1,400㏄와 1,600㏄ 2개 모델로 나오는 완전히 새로운 차지만 ‘프라이드’라는 이름으로 프라이드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셈이다. 이 역시 옛 차의 명성을 통해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더 받을 수 있는 데다 마케팅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경우는 최근 ‘이름만 빼고 다 바꿨다’는 신형 ‘마티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98년 4월 출시 이후 전 세계에 130만대 이상이 판매된 ‘마티즈’의 옛 명성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전략. 실제로, GM 대우차 관계자는 “이번 마티즈는 전혀 다른 신차지만, 그 동안 축적해온 마티즈의 명성과 영예를 잇기 위해 이름을 계속 사용키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85년 첫 출시된 이후 20년간 쏘나타, 쏘나타Ⅱ, 쏘나타Ⅲ, EF쏘나타를 생산해 온데 이어 지난해 말 5세대 쏘나타를 출시한 현대자동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새롭게 개발된 자동차지만, 그 이름 만큼은 다시 ‘쏘나타’를 붙여 출시했다. 기아의 ‘스포티지’도 같은 경우다. 지난해 8월 ‘KM’(프로젝트명)을 출시하면서, 93년 첫 선을 보인 후 국내외에서 56만여 대가 판매된 스포티지로 이름을 정했다. ‘투싼’의 플랫폼을 사용해 투싼보다 늦게 출시됐지만, 이 같은 후광효과 덕분에 지난해 2만7,559대, 지금까지 총 4만5,000여대가 판대되는 등 투싼보다 더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의 이 같은 복고마케팅에 대해 제일기획 광고기획팀 박재항(43) 팀장은 “복고 마케팅이라 하더라도 품질까지 예전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현대성을 반영한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며 “최근 출시되는 자동차들이 거기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명성을 너무 의존한 나머지 옛 이름, 분위기, 풍경만 얄팍하게 깔고 상품을 내 놓았다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 상품의 이미지는 물론, 기업의 이미지까지 망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이버 세상도 복고에 물들어
입는 것, 먹는 것, 타는 것 등 사회전반을 꿰뚫고 흐르는 복고의 바람은 최첨단을 달리는 컴퓨터 게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어두컴컴한 세계로 들어가 동전 몇 개에 손바닥의 진땀을 빼던 오락실 게임이 인터넷에서 다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갤러그, 제비우스, 바블보블, 너구리 등 오락실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게임들이, 부모님들의 눈을 피해 출입하던 당시의 오락실 추억을 가진 중년층은 물론, 젊은 층에서 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애초 방문자를 늘리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되던 것들이었지만, 이 같은 호응을 감지한 야후코리아는 지난 3월 유료로 서비스를 제공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광고기획사 JWT 애드벤처의 기획2본부 강민수 차장은 “모던 혹은 첨단이라는 키워드를 기저에 둔 단순성(simplicity)의 진화적 흐름에 비하면 ‘복고’는 오히려 현시적(現時的) 개념”이라며 “‘복고’를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라는 시대착오적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눈부신 IT기술의 발전 속도로 인하여 신제품도 구입하는 순간부터 ‘구닥다리’가 돼버리는 요즘, 20~30년 전의 모양을 한 상품이나 당시의 이름을 딴 상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모순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옛 모습, 맛, 이름을 가진 제품들이 살가웠던 시절의 추억을 묻혀내며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하는 제품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민승기자


입력시간 : 2005-04-27 16:42


정민승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