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 21세기형 차이나타운 건설, 인천 등도 재건 움직임 활발

한국 화교사회 부활 기지개
일산에 21세기형 차이나타운 건설, 인천 등도 재건 움직임 활발

한국에서 화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시 등을 꼽을 수 있다. 화교 상공인들의 경제 단체인 한국중화총상회 자료에 따르면 2001년 기준으로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화교는 서울 8,900여명, 인천 2,900여명, 부산 2,000여명, 대구 1,000여명 등으로 나타났다.

한국 화교 120년 역사에서 이들 4개 도시는 화교들에게 생활과 생업의 주된 터전이었다. 많은 화교들이 모여서 활동했던 까닭에 자연스레 차이나타운(China Town)도 형성됐다.

서울의 소공동ㆍ명동, 인천의 북성동(선린동), 부산의 초량동, 대구의 중앙로 일대가 차이나타운으로 명성을 얻은 곳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천 북성동은 국내 최초, 서울 소공동과 명동은 국내 최대의 중국인 거리로 한동안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화교에 대한 차별 정책이 심해진 1950년대 이후로 국내 차이나타운은 서서히 활기와 빛을 잃어갔다. 경제적 억압과 사회생활의 각종 제약이 화교들을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탈(脫) 한국 행렬을 불러 왔기 때문이다.

화교경제의 상징 차이나타운

1970년대 초부터 화교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차이나타운은 말 그대로 유명무실해졌다. 그나마 장사가 잘 됐던 중화 요리점도 한국인에 의해 하나씩 둘씩 잠식됐다.

더불어 공생하던 잡화점이나 당면 공장, 배갈 공장 등도 잇달아 문을 닫았다. 차이나타운을 등진 화교들은 미국, 대만 등지로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이처럼 한국 경제의 발전과는 정반대로 쇠락의 길을 걸었던 차이나타운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범중화경제권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따른 결과다.

이들 지역과의 경제 교류ㆍ협력을 강화하고 투자를 유치하려는 한국 측이 차이나타운 재건을 우선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차이나타운은 그 나라 화교 경제의 상징이다. 동시에 세계의 화상(華商)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창구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중화권과의 경제적 파트너십 형성에 차이나타운을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아주 가까울 뿐 아니라 최대 교역국 중 하나로 자리잡은 반면 화교 자본의 국내 투자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중국 본토 밖의 거대 화상들은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잘 알고 있지만 거래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주저한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기에는 변변한 차이나타운 하나 없고 화교들을 배척해 온 한국의 풍토도 한 몫을 했다.

지난 7일 경기 고양시 일산 한국국제전시장(킨텍스ㆍKINTEX)에서는 한국 화교 역사에 새 장을 여는 행사가 개최됐다. 국내 자본과 화교 자본이 손을 맞잡고 추진 중인 ‘일산 차이나타운’의 착공식이 마침내 열린 것이다.

일산 차이나타운은 이른바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라는 화교권의 오명을 씻자는 취지에 공감한 국내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화교들이 1999년부터 합심해 노력해온 첫 번째 결실이다.

국내·화교자본 공동투자, 2001년 완공

일산 차이나타운 건설에 깊이 관여한 한 핵심 관계자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라는 현실에 대해 문제 제기를 1990년대 중반에 했었지만 그 때는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발발 이후 한 푼의 달러가 아쉽게 되자 화교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차이나타운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도 깨닫게 됐다”며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일산이 차이나타운 부지로 선택되기까지는 적잖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1998년 무렵 정부 외자유치단의 고문으로 일했던 한 인사의 이야기다.

“인천 북성동과 송도를 후보지로 정해 동남아 지역 화상들에게 설명하러 다녔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한국 경제의 중심인 서울이 아니라는 게 그들이 탐탁치 않게 여긴 이유였다. 귀국한 뒤 고건 서울시장에게 그들의 말을 전했더니 뚝섬과 상암동을 후보지로 내주었다. 그러던 와중에 임창열 경기지사가 일산을 후보지로 제안하며 뛰어들었다.”

한국 투자를 저울질하던 화상들의 생각은 차이나타운 후보지를 선정했던 한국 측 인사들과는 매우 달랐다.

한국 측이 당초 인천 북성동을 후보지로 내세운 것은 그곳이 과거 한국 차이나타운의 대명사였기 때문인데, 화상들은 세계 각국의 신(新) 차이나타운 흐름에 맞지 않다며 낙제점을 줬다.

뚝섬과 상암동은 서울이라는 장점을 가졌지만 주변 지역과 연계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시 배제됐다. 결국 서울과 가깝고 공항으로의 교통도 양호하며 개발 여지가 넓은 일산이 최종적으로 낙점됐다.

일산 차이나타운 건설 사업은 국내 자본과 중국, 홍콩 등지의 화교 자본이 함께 투자한 서울차이나타운개발㈜이 주도하고 있다.

공사는 2단계로 진행된다. 우선 1단계에서는 킨텍스 지원시설 부지 2만1,000평에 쇼핑몰과 연구ㆍ교육시설을 함께 갖춘 연 건평 17만평 규모의 초현대식 타운이 지어진다. 1단계 공사는 2007년 3월 마무리되며, 총 1,200억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이어 2단계에서는 특급호텔, 문화교류센터, 무역센터 등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총 사업비 7,000억원이 투입되는 일산 차이나타운은 2011년에 완공된다.

서울차이나타운개발 관계자는 “퓨전(fusion)과 그린(green)을 표방한 일산 차이나타운은 화교뿐 아니라 한국인, 서양인 등이 함께 어우러지고 쇼핑ㆍ교육ㆍ연구ㆍ주거ㆍ비즈니스가 한 곳에서 이뤄지는 21세기형 차이나타운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막 첫 삽을 뜬 일산 차이나타운은 전 세계 화교의 비즈니스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8차 세계화상대회(10월9~12일)의 서울 개최에 맞춰 한ㆍ중 교류 분위기 고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추진 중인 차이나타운 건설 사업에도 자극제가 될 전망이다. 현재 정부와 인천시는 인천 청라 지구에 ‘아시안 빌리지’라는 이름의 차이나타운 조성을 계획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화교 재벌인 리포그룹이 여기에 투자할 의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투자가 성사된다면 지지부진하던 인천 지역 신 차이나타운 건설 사업이 크게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일산과 인천의 신 차이나타운 건설과는 별개로 구 차이나타운들도 최근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인천 북성동과 부산 초량동은 해당 자치단체의 노력으로 새 단장을 마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특히 대중(對中) 무역이 활발한 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은 화교가 북적였던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시대의 변화 속에 부침을 거듭했던 한국의 차이나타운. 과연 21세기에는 거듭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적극적인 구애 공세가 펼쳐지는 가운데 공은 다시 화교들에게 넘어가는 양상이다.

한국 화교사 주요 연표

1882년- 임오군란 발발과 함께 청군의 군역 상인으로 화상들이 처음 서울에 옴

1884년- 인천에 청국 조계(租界)가 설정됨.

1901년- 서울 지역 화상들이 연합해 한성중화상회 설립함.

1912년- 중화민국 수립으로 서울의 청국 총영사관이 중화민국 총영사관으로 바뀜.

1913년- 인천, 부산, 원산의 중화민국 조계가 폐지됨.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조선 전역에 화교 배척 경향이 확산됨.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장개석 국민정부 대만으로 옮겨감.

1955년- 중화요식업총회 설립.

1957년- 무역법 제정(외국인 무역업자는 한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됨)

1961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령 공포.

1968년- 외국인토지법 공포. 주택용지는 200평, 영업용지는 50평으로 소유 한도가 설정됨.

1973년- 중화음식점 쌀밥판매금지령 공포(3개월 만에 해제).

1992년- 한ㆍ중 국교 수립과 동시에 한ㆍ대만 국교 단절.

1998년- 화교의 체류 허가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

1999년- 한국화교경제인협회 설립. 외국인의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토지소유 제한 조치가 해제됨.

2002년- 한성중국교민협회 창립. 화교에 영주권이 부여됨.

2004년- 한국중화총상회 설립.

2005년- 세계화상대회 서울 개최.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10-12 10:17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