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부르짖던 미국 · 유럽 국가들, 해외자본 · 기업 진입장벽 높여

▲ 뉴욕 브루클린 항 컨테이너 터미널. 미 의회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항만회사가 운영권 인수합병에 나서자 제동을 걸었다. / 로이터
1997년 외환 위기로 혼수 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를 두고 미국 유럽 등 경제 선진국들은 “덩치만 컸지 속은 곪을 대로 곪았다”며 “다른 나라의 자본 상품 노동력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오가도록 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꾸짖었다.

세계화 논리에 따라 관세와 무역 장벽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최선이라는 뜻이었는데 한국은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우등생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의 KT&G에 대한 공개 매수 시도가 논란을 빚을 만큼 국가 경제 전체가 국제 투기 자본에 좌우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반면 세계화를 따르라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도리어 자국으로 들어오려는 해외 자본을 막으려 애쓰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에너지ㆍ금융 등 핵심 산업이 다른 나라 기업에 의해 인수합병(M&A)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내 기업 끼리 짝을 맺거나 법을 새로 만들어 해외 기업의 진입 자체를 차단하고 있다.

미 의회는 중국, 중동의 국영기업이 자국 정유, 항만 회사를 인수 합병하려고 하자 거부권을 행사해 제동을 걸었다.

다른 나라에게는 문을 열라 압박하면서 정작 자국의 문은 꽁꽁 닫는 이중성에 또 다른 국수주의라는 비난이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선진국들은 오히려 ‘경제 애국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러시아나 중남미 국가들은 이 틈을 노려 민영화했던 핵심 국영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 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유일한 규칙으로 여겨졌던 세계화가 외면 받고 있는 셈이다.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선진국들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산업이 외국 기업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결국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될 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며 “특히 중국이나 중동 등 신흥 강국들이 큰 손으로 떠오르면서 이 같은 걱정은 더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의회는 최근 아랍에에미리트(UAE)의 두바이포트월트(DPW)가 뉴욕 뉴저지 등 6개 항만 운영권을 인수하려 하자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나서 이를 무산시켰다.

중동 국영 기업에 항만을 넘기면 안방을 내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안보 위협론이 그 이유였다.

지난해 중국 국영기업 중국해양석유(CNOOC)가 미국 에너지기업 유노칼을 인수하려 했을 때도 “경쟁국 중국이 에너지를 가지고 위협할 경우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시장 개방, 잃는 것 많다"

유럽 전역은 지금 해외 기업의 진입 장벽을 쌓고 높이기에 바쁘다. 프랑스가 가장 열심이다.

지난달 프랑스의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국영 가즈드프랑스(GdF)와 민간 에너지 기업 수에즈의 합병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는 이탈리아 기업 에넬이 수에즈를 M&A 하겠다고 발표하자마자 나온 것으로 결국 에넬이 수에즈를 뺏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드 빌팽 총리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기간 산업을 외국 기업으로부터 지키는 것을 ‘경제 애국주의(economic patriotism)’라고 이름 붙였다.

프랑스는 지난해 철강ㆍ에너지 등 11개 핵심 산업에 대한 해외 기업의 M&A 시도에 대해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고 최근에는 주주들의 의결권을 강화하는 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스페인은 지난달 독일 에너지 회사 에온이 스페인 엔더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서자 급히 인수합병 규제 계획을 발표했다.

앞서 프랑스는 스페인, 룩셈부르크와 손잡고 세계 1위 인도 철강기업 미탈스틸이 2위 아르셀로 인수를 막기 위해 공동 대응하고 있다. 폴란드는 EU가 승인한 이탈리아 우니크레디트 은행의 자국 은행 BPH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프랑스가 자국 기업 에넬 인수 작업을 방해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지난해 네덜란드계 금융기업 ABN암로가 자국 안톤베네타를 인수하려던 것을 방해했다.

독일은 2004년 외국인에 의한 자동차기업의 적대적 인수를 막으려고 제정한 ‘폴크스바겐 법’까지 만들었다.

이웃 일본은 지난해 기업들의 법적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을 마련, 신(新)회사법을 공표했다. ▦ 황금주(Golden Share) 설정 ▦ 복수의결권 주 발행 ▦ 신주발행권을 이용한 독소조항 등 ‘적대적 매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기업에 제공했다.

이렇듯 정부나 의회가 세계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대해 국민들 역시 지지를 보내고 있다.

AFP 통신은 “국민 대다수는 시장 개방으로 자신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품고 있다”며 “이익은 소수에게만 쏠리고 대다수는 잃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라구람 라잔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선진국 국민은 값싼 수입품이 시장을 점령하고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생계를 위협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포퓰리즘" 비난

시장주의자들은 각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을 두고 ‘경제적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고 비난하면서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화를 통해 이미 세계 경제가 상당히 상호의존적이 된 상태에서 반 세계화 흐름은 경제 자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국제 차원의 기업 M&A는 9,000억 달러에 이르러 1999~2000년을 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며 “반 세계화 흐름은 상품, 서비스 거래는 물론 기업 자체 매매 기세를 꺾을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잇따른 M&A 시도 저지로 인해 자칫 해외 투자가 줄어들까 고민 중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주 DPW가 의회의 저지로 무산된 뒤 “중동을 비롯해 미국 투자에 우호적인 나라들이 다른 생각을 할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미국은 국내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주 100억 달러의 해외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땅이나 회사를 사거나 현지에 공장을 지으려는 직접 투자를 막을 경우 결국 국채 발행 등 간접 투자로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면서 “이 경우 금리 인상 등이 불가피해질 것이고 이는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 전체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나의 유럽을 추구하는 유럽연합(EU)은 속이 탄다.

줄리오 트레몬티 이탈리아 경제장관은 “서비스 노동 시장 개방 등으로 피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국민 여론을 의식한 각국 정치인들이 이를 정치 쟁점화할 경우 지난해 프랑스, 네덜란드의 유럽헌법 부결 이상으로 큰 충격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EU측은 세계화 흐름을 거스르려는 회원국에 대해 규정 위반이라고 경고하지만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 말고는 실질적 제재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맘에 들지 않은 중앙아시아 국가에 대한 가스 공급을 끊어버린 바람에 혼이 난 유럽 국가들을 바라보면서 세계 각국은 에너지 확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핵심 산업을 지키려는 각국의 움직임은 갈수록 활발해 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한다.

이코노미스트 역시 “미국경제의 퇴조가 가시화하고 이것이 무역 상대국에게 까지 파급효과를 미친다면 전 세계에 보호주의 흐름은 더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