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고급 와인' 이미지 관리하며 중저가 시장에도 도전, 가격대비 좋은 품질 102가지 소개… 칠레산 등에 맞불

‘무똥 로칠드, 라뚜르, 마르고, 오브리옹, 라피뜨 로칠드…’

최고급 프랑스 와인으로 명성 높은 브랜드들이다. 보르도산 와인들 중 최고급 와인을 일컫는 ‘그랑크뤼’에 속하는 이들 브랜드는 그 안에서도 또 최고 등급인 ‘프리미에 크뤼’급으로 분류된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치와 품격을 인정받아 와인 애호가들은 수백만, 수천만원의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이들 명품 와인을 마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명품 와인 하면 사람들은 프랑스 와인을 떠올린다. 와인의 원산지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프랑스 와인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도 이름난 고품격 와인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와인이라고 하면 으레 고급스럽고 비싼 와인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이 고개를 숙였다. 한마디로 ‘프랑스 와인 중에서도 부담 없는 가격에 맛좋은 와인이 있다’는 것을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알리기 시작하고 있다.

명품 와인을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턱을 치켜든 도도한 자세로 서 있기만 하던 프랑스 와인이 이제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는 ‘프랑스=명품 와인’ 이미지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프랑스 와인 이미지에 또 하나의 모습을 추가로 선보이는 셈이다.

1~4만원대 와인 집중 소개

최근 국내 프랑스 와인의 절대 다수인 60%를 점유하는 보르도 포도주 연합회는 한국을 찾아 ‘부담없이 즐기는 보르도 와인’이라는 판촉 행사를 열었다.

시중에서 병당 1만5,000원에서 4만원 사이에 마실 수 있는 가격대의 보르도 와인만을 집중적으로 선보인 이 행사는 그동안의 ‘보르도 와인=고가 와인’ 이미지에 비하면 제법 파격적인 일이다.

연합회와 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소펙사)가 함께 마련한 이 행사의 공식 명칭은 ‘100+2 보르도와인 시음회’. 이름처럼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보르도산 와인 중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한 102가지 와인이 선보였다.

와인 선정은 13명의 국내 선정위원들이 맡았다. 최성순 와인21닷컴 대표, 방진식 대한항공 와인/음료 계획 담당, 김준철 서울와인스쿨 원장, 이인순 WSET 교육부장 등 선정위원들은 이틀간 블라인드 테스트를 벌이며 102가지 와인을 골라냈다.

“와인이 고가에만 치중돼 있는 이미지가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가격면에서 부담 없고 품질이 훌륭한 보르도와인을 선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신라호텔에서 17년 넘게 소믈리에로 일한 와인 전문가 원로인 서한정 와인나라 와인아카데미 원장은 “우리나라에 중저가대의 보르도 와인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이들 와인이 보르도 와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 블렌딩 와인이 표현해 내는 우아함과 섬세함, 개성까지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어 또 한번 놀랐다”고 말한다.

선정 기준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으며 우리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와인을 골라내자는 것.

선정된 것는 드라이 화이트 와인 12종, 레드 와인 88종, 스위트 와인 2가지. 지역별로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메독과 보르도 쉬페리어 와인도 각각 38종이 포함됐다. 특히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보르도 꼬뜨와인 2종류도 함께 소개됐다.

선정위원들은 “꽤 많은 와인들이 과연 4만원도 안 되는 가격이 맞냐”고 할 정도로 맛이 좋아 주최측에 가격을 다시 한번 확인까지 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국내 최고의 와인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는 최성순 와인21닷컴 대표는 “시중가 4만원 이하의 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며 “이번 기회에 보르도에는 고가의 와인만 있다는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또 국내에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스 남부 지방의 와인들도 최근 판촉에 적극 나서고 있다.

1927년에 설립된 프랑스 와인전문 신문사인 ‘와인의 날(La Journee Vinicole)’과 주한 프랑스대사관 경제상무실도 최근 ‘프랑스 와인들의 세계 여행’이라는 주제로 서울 전시회를 가진 것.

행사에는 랑그독-루시용, 발레드혼, 프로방스, 샹파뉴, 알사스 등 원산지별로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100여 가지의 프랑스 와인들이 전시됐다.

가격 대비 좋은 품질의 와인이 선정 기준. 보르도나 브루고뉴 지방의 와인에 밀려 명함을 내밀지 못하던 이 지역 와인도 프랑스 내 여타 지역 와인보다 저렴한 가격과 품질을 내세우며 한국 소비자의 입맛 잡기에 본격 가세한 셈이다.

칠레 · 호주 와인 시장 점유율 높아져

프랑스 와인이 이처럼 예전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다시 말해 칠레, 남아공, 호주산 등으로 통칭되는 신세계 와인의 거센 도전에 프랑스 와인이 한국 와인 시장에서 갖고 있던 독보적인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

이는 매출 수치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국주류수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산 와인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36.9%(가격 기준)으로 2004년 45.4%에 비하면 무려 10% 가까이나 떨어졌다. 한 해 전인 2003년에 국내 시장의 절반인 49.5%를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위기의식까지 들 정도다.

반면 대표적인 신세계 와인으로 꼽히는 칠레 와인은 지난해 시장 점유율이 17.6%를 기록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2004년 13.8%, 2003년 6.5%였던 것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신장세다. 특히 가격에서 경쟁력이 앞섰던 칠레 와인은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놓고 있다.

가격이 아닌 물량 면에서 프랑스 와인은 더 열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점유율은 22.8%. 한국에 수입되는 와인 국가 중 1위다. 하지만 금액 면에서 36.9%로 1위를 차지한 것과 간격이 벌어진 것을 보면 ‘프랑스 와인이 다른 국가 와인보다 상대적으로 고급 고가 와인 시장에서 강세를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량은 적게 나갔어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와인이 많이 팔렸기 때문에 금액과 물량의 시장점유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일부에서 ‘프랑스 와인 하면 비싸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김순중 한국주류수입업협회 부회장은 “프랑스 와인 중에 워낙 고급 와인이 많다 보니 프랑스 와인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프랑스 와인도 고가부터 중저가까지 워낙 다양하며 단지 그동안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라며 “프랑스 와인에 대한 심리적 부담도 이제는 해소될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결국 한국도 와인 시장 단계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임명주 소펙사 소장은 “어느 나라나 프랑스 와인은 그랑크뤼 등 고가 명품 와인부터 소개되고 이후 중저가 와인이 알려지는 단계를 밟아 왔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도 이제 슈퍼나 마트에서도 가볍게 구입해 즐길 수 있는 보르도 와인을 찾을 때가 됐으며 한국의 와인 시장의 외연도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인터뷰 - 보르도 포도주연합회 회장 크리스티앙 델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보르도 와인도 값 비싼 고품격 명품와인뿐 아니라 대중적인 중저가 와인까지 층이 다양합니다.”

국내에 보르도산 중저가 와인을 소개하기 위해 최근 한국을 찾은 크리스티앙 델쁘 보르도 포도주연합회 회장은 “보르도 와인 하면 고품격의 고가 와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기존 고급 와인 이미지를 저버리거나 상처를 주게 되지 않을까’하는 것. 이 대목에서 특히 경계심을 가진 표정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는 “고가 와인과 대중 와인의 차별화 전략일 뿐”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전 세계에 와인을 수출하는 나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칠레, 호주 등 소위 신세계 국가들이 수출을 시작한 1990년대부터 시장 환경이 급변했지요.”

프랑스 와인이 도전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보르도 와인이 한국에서처럼 중저가 와인을 소개하는 것이 새삼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반복된 일이고 한국도 이제 차례가 온 것이지요.” 연합회는 그간 우리보다 와인 문화가 일찍 확산된 일본, 홍콩 등에서도 비슷한 판촉행사를 벌여왔다.

“햇빛과 비옥한 땅의 지방 보르도는 수백만년의 세월을 버텨온 점토와 석회, 모래, 물이 어우러져 와인을 만들어냅니다. 보르도의 포도 품종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다양한 맛을 표현해내지요.”

그는 “보르도는 소규모의 포도원에서 장인들이 와인을 만들어 낸다”고 자부심을 표현한다. 엄청나게 넓은 경작지에서 대량 생산으로 값싸게 포도주를 만드는 신세계 와인과는 다르다는 의미.

“2000년까지 보르도 와인의 매출은 계속 늘었습니다. 이후 2004년까지 생산량이 답보상태였지만 2004년부터 다시 수출이 늘고 있어요.” 그는 “잠시 신세계 와인의 공격에 주춤하지만 그는 역사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와인의 힘을 소비자들이 다시 분명하게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를 표시했다.

인터뷰 - 프랑스와인 월드투어 매니저 개땅 삐에르
“프랑스 와인도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랑그독-루시앙, 꼬르비에르, 뱅드 빼이독 등. 이것들도 기억해 주세요.”

최근 서울에서 ‘프랑스 와인들의 세계 여행’이라는 주제로 프랑스 와인 전시 및 시음회를 가진 개땅 삐에르 프랑스와인 월드투어 매니저는 “일반인들이 프랑스 와인의 다양함을 하루 빨리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있는 와인 산지의 수많은 브랜드를 판촉하고 있는 그가 특히 중점을 두는 지역은 남부 프랑스. 그는 “대규모 와인 산지가 밀집해 있는 이곳에는 그만큼 와인의 맛과 종류도 풍성하다”고 강조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프랑스 와인은 보르도와 브루고뉴 지방의 와인입니다. 상대적으로 남부 지방은 인지도가 낮지요.” 그는 “프랑스 남부 지방 와인은 이들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이 취약, 그간 마케팅 등에서도 뒷전에 처진 것일 뿐 품질에서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태양은 뜨겁고 토양도 비옥합니다. 와인을 만들 포도가 자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성숙한 조건이지요.” 때문에 프랑스 남부의 와이너리들은 그동안 와인의 대량 생산지로 손꼽혀왔다. 브루고뉴 등 지방에 와인을 공급하면서 블렌딩하는데 널리 사용돼 온 것.

하지만 이들 남부 지방도 1985년 이후 자기 이름을 내건 와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질을 높이고 포장도 세련되게 해 소매 시장에 적극 다가서고 있다. “남부 프랑스의 와인이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가치를 인정받을 때가 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3번째. 3년 전 지중해에 접한 남부 프랑스 와인을 알리려 방한했고 지난해 부터는 프랑스 전역의 와인을 홍보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의 와인에만 집착하진 마세요.” 독일과 접한 알사스 지방의 화이트 와인 등 여러 지방의 와인을 함께 소개하는 그는 “새로운 와인이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