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전 농협 신용 대표이사 현의송8개월간의 일본 농촌 배낭 여행기 '밥상 경제학' 책으로 펴내. 日 농촌 수입 절반이 농외소득… 우리 농촌도 변해야 생존

‘농촌에는 유년기 7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일생 꿈속의 무대는 언제나 예외 없이 농촌이었다.’

낙후된 농업환경을 바꾸겠다며 농과대학 졸업 후 농협중앙회에 들어갔다. 그 이후로 40년. 열혈 청년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다. 그러나 농촌의 팍팍한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보릿고개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도시 근로자와 점점 커져 가는 부의 격차는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UR(우루과이 라운드), WTO(세계무역기구), FTA(자유무역협정)는 농민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돈벌이가 될 만한 작물이 별로 없고, 외국에서 값싸게 수입된 작품들은 우리 농민의 설 자리를 빼앗는다. 아니, 농사지을 사람조차 없다.

현의송(64ㆍ전 농협 신용 대표이사) 씨는 그래서 일본으로 떠났다. “농촌 문제 해결한다고 농협 들어갔는데, 40년 동안 바꾼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경기 분당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돋보기 안경을 쓴 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현 씨는 이 같은 마음의 부채(負債)론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생 농촌 농민과 함께 한 삶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농업문제 전문가. 곡창 지대인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후 농협중앙회에 입사해 주요 부서를 두루 거쳐 최고 경영자인 신용 대표이사까지 역임했다. 국내 유력 농업전문지인 농민신문사 사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농민과 고향만을 생각하며 살았음에도 은퇴 후 마음이 무거웠다. 농촌에 대한 애정이 커서 그랬는지.

2005년 8월부터 올 3월까지, 8개월간의 배낭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농민신문사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여행 경비는 다름 아닌 퇴직금. 배낭 안에는 노트북 컴퓨터 한 대와 카메라를 챙겼다.

편안히 효도 관광 다녀야 할 나이에, ‘사서 고생한’ 소감을 물었다.

“항상 즐거웠어요. 신바람이 났죠. 초기 잠깐 동행했던 아내는 농촌을 뛰어다니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마치 신들린 사람 같다고 의아해 했지만요. 온천에 편안히 몸을 담그는 것도 아니고, 뭐 그리 농촌 들판을 뛰어다니면서 좋아하느냐고요. 하지만 전 어떤 호화 여행보다 행복했어요. 일본의 성공 사례를 보면서 이것은 어느 군에 저것은 또 어느 읍에 적용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현 씨가 펴낸 ‘21세기 신사유람단의 밥상 경제학’(이가서 펴냄)은 이렇게 일본 농촌 구석구석을 직접 걸어 다니면서 목격한 일본 농업의 성공 키워드를 밝힌 책이다. 일본 농촌 40여 곳의 성공 사례를 상세하게 파헤쳤다. 이른바 21세기 ‘신(新) 농사직설’인 셈이다.

“일본 농가는 도시 근로자 가구에 비해 약 120%의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처럼 도시보다 잘 사는 농촌을 만든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말해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시보다 잘 사는 일본 농촌의 성공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농민은 무엇보다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이에 발빠르게 대처해나갈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농민들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이에 대한 인정이 쉽지 않죠.” FTA 반대 등 시장경제의 대세를 막으려 하기보단,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확보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현씨는 말한다.

현재 일본 농가의 두드러진 특색은 겸업(兼業)농가라는 점이다. 대다수 농가가 농업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 소득의 절반 이상을 농외소득에서 얻고 있다.

“쉽게 말해 농사를 지어서 시장에 물건을 내놓으면 끝이라는 식으론 부자 농민이 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무 한 뿌리를 100원 받고 시장에 팔 것을, 깍두기를 만들어 설렁탕 집에서 팔면 1,000원에 비싸게 팔 수 있죠. 농업이 언제까지나 1차 산업에 머문다면, 희망은 없습니다.”

일본 도쿠시마현 가미가쓰(上勝)읍은 요리 장식용 나뭇잎 판매사업(감나무에서 감잎을 따서 예쁘게 염색해 판매하는 사업)으로 연간 2억5,000만엔(한화 25억원 상당)의 수입을 올린다. 이곳 나뭇잎 판매 사업에 등록한 회원 170여 명 가운데 주력은 60대 이상 할머니들. 이들 할머니의 평균 연령은 67세로 고령임에도 월 수입 200만엔(2,000만원)을 넘는 고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일본 오오야마(大山)농협이 1990년에 개점한 농가레스토랑 ‘오가닉 농원’과 직매장, 매실 관련 가공품 판매장(약 4,000평 규모)의 2004년 총 매출액은 15억엔(150억원)이나 되었다.

다차원 농업수익구조 다양화가 살길

이처럼 농가에서 가공ㆍ유통은 물론 농가 식당까지 운영하는 것이 일본 농촌에서는 흔하게 목격됐다. 한국 농업도 다차원화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우수 상품으로 팔리는 일본 농산물의 80% 이상이 재배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 생산 이력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솔직히 유기농 제품이라고 비싸게 팔리는 농산물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농약이나 비료 등 재배 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 하나. 발전한 일본 농가에는 공통적으로 한국에는 없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인재, 다시 말해 리더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대부분은 공무원이었다 -지역 발전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공직자- 우리 사회에선 그야말로 한낱 이상에 머무는 구호 같은 얘기가 그들에겐 실재했다.

“일본의 지역 경제가 활성화된 곳에는 반드시 리더가 있었는데 그중 90% 이상이 지자체 공무원이었지요.”

그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애석해 하는 점은 바로 그러한 “우리 고향을 반드시 일으키겠다”는 공직자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공직자의 인식 변화는 정말로 시급합니다. 한번 보세요. 보통 1개 군의 공무원만 700~800명이 되는데 그들 거의 전부가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해요. 교직원도 마찬가지고요. 단순 월급쟁이일 뿐, 그 지역의 발전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죠.”

거의 100%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일본 농촌 공무원과는 너무 대조적이라고 현 씨는 힘주어 말한다. 이것이 농촌의 발전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한계라고 그는 설명한다.

더불어 그는 지나온 삶도 되돌아봤다. 일본 농촌 기행을 한 지난 8개월. 현 씨는 “솔직히 현직에 있었던 40년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과 달리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따지는 일본 농촌 시찰은 사실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농장을 한번 둘러보는 시찰 요금으로 3만엔(30만원)을 요구하는가 하면, 식사 때가 돼도 같이 밥 먹자는 권유가 없었다. “구석진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는데 주인은 밥을 줄 생각이 없고, 인근에는 식당이 없으니 별 수 있나요? 끼니를 거르기도 했죠.”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디지털 카메라로 일일이 사진을 찍고, 노트북 컴퓨터로 기록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고 털어놓았다. “A4 3~4장 분량을 치느라 꼬박 밤을 새운 적도 부지기수였죠.”

일본 히로시마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임대한 월 5만엔짜리 다다미 방은 냉난방이 잘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인터넷 검색을 하기 위해선 열차를 타고 20분 거리의 대학에 가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출장비 주고, 월급도 줄 때 더 열심히 뛸 걸 하고 후회도 했어요. 하하”

현씨는 그러나 또 얼마 후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농산물을 주로 살펴봤는데 다음에는 축산물 현황까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중국 농촌도 돌아볼 계획"

그는 글로벌 시대, 이웃나라의 농업 환경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우리의 경쟁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믿고 있다. “내친 김에 중국어도 배워 중국 농촌도 돌아볼 작정이지요.”

일본 중국을 능가하는 농업 부흥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대도시가 발전한다고 농촌을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농촌에 기반 투자를 해야 합니다. 선진국이라는 영국만 해도 부자들이 농촌에 살아요. 농촌에서 도시처럼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농촌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생활공간이 아니겠습니까.”

현씨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고향’을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것이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