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화섬 지분 인수로 태광그룹 주가 일시적으로 급등, 향후 변화에 시장 촉각

▲ 태광그룹 주력 계열사인 흥국생명 빌딩.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주도하는 이른바 ‘장하성 펀드’(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ㆍKorea Corporate Governance Fund)가 특출한 재료 없이 잠잠하던 국내 증시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

첫 번째 공격 대상으로 삼은 대한화섬과 태광그룹의 주가가 급등하면서 증시에 ‘자산주’(기업의 자산가치가 시가총액을 훨씬 상회하는 종목) 테마를 형성한 것은 물론 국내 기업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기업지배구조’ 논란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연일 상한가를 치던 태광그룹 주가는 최근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장하성 펀드 후폭풍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하성 펀드는 대한화섬의 지분 5.15%를 매입한 목적을 경영 참여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그러면서 태광 측에는 ▲소액주주 권리 개선 ▲독립적인 이사회 운영 ▲회사와 계열사간 거래 투명성 개선 ▲유휴자산의 매각 등의 제안을 해 놓은 상태다. 이 모든 요구는 물론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둔의 기업’ 혹은 ‘돈 많은 알짜 기업’ 등으로 알려진 태광그룹의 지배구조가 어떻길래 장하성 펀드의 타깃이 됐을까.

우선 대한화섬의 지분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과 계열사 등 특수관계인이 70%가 넘는 지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화학섬유를 주력으로 한때 황금알을 낳았지만 섬유산업 하강으로 최근에는 본업보다 그룹의 투자 창구 역할을 주로 해왔다.

실제 대한화섬은 지난해 12월 우리홈쇼핑 지분 7.38%를 취득한 데 이어 지난 4월에는 예가람저축은행을 인수했다. 여기에 소요된 비용은 대략 450억여 원으로 이는 장하성 펀드 효과로 주가가 불붙기 전인 23일 기준 시가총액의 절반에 이르는 규모. 이밖에 흥국생명, 고려상호저축은행 등 계열사 지분을 포함하면 유가증권 보유액은 1,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또한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 자산도 상당한 규모에 이른다.

대한화섬은 태광그룹 전체 지배구조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태광산업->대한화섬->흥국생명->태광산업으로 연결되는 삼각 순환출자 구조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것. 이런 구도는 국내 대표적인 재벌들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용하는 낯익은 수법이다.

▲ 장하성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장하성 교수가 대한화섬 지분 인수 배경을 설명하면서 주가가 저평가된 대한화섬뿐 아니라 태광그룹 전체의 지배구조 개선을 염두에 뒀다고 밝힌 것도 바로 이런 속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지배구조가 바람직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국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열풍이 불면서 외부로부터 강제된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이런 흐름을 못마땅해 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나름대로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고 내실 경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태광그룹측이 “왜 우리 지배구조가 나쁘냐”고 반문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재계 일각에선 한국적 경영 환경에서 성장해온 토종 기업들에게 일률적인 서구식 지배구조를 적용하는 것은 부작용을 부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회사마다 처한 상황과 경영의 목표가 제각각인데 어떻게 지배구조를 한 가지 틀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낡은 지배구조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인으로 지적돼온 데 대해서도 반론이 없지 않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 증시의 주가가 저평가되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가 국내 기업들의 취약한 지배구조 탓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는 북한 변수, 정치적 불안, 소모적 노사관계 등이 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본다”며 “한국적 기업지배구조가 기업가치 저평가와 반드시 직결된다는 주장은 실증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반대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명시적으로 기업가치의 제고에 기여한다는 증거도 찾기가 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개발연구원 조성빈 연구원의 ‘기업지배구조의 상호관계 및 기업성과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예를 들어 사외이사 제도와 같은 지배구조 개선 장치를 도입한 경우에도 기업가치 제고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한다는 실증적 분석 결과가 나타났다.

물론 조 연구원은 이 같은 제도의 효용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활용 과정에서 효과가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는 지배구조를 통제하는 장치들이 유기적,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동일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더라도 기업별, 산업별 특성에 따라 다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은 귀담아 들을 대목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해당 기업의 이해 당사자들이 과연 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무엇이냐 하는 고민을 터놓고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대주주만이 아닌 모든 이해 관계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한 지배구조라고 말하는 장하성 교수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대주주를 포함한 몇몇 사람의 전횡보다는 다수의 지혜에서 나온 경영 방침이 훨씬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전개될 장하성 펀드와 태광그룹의 기싸움은 국내 기업지배구조의 방향성에 대한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전망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