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맞선 주선은 기본··· 건강관리· 문화· 풍수까지 무한 서비스 경쟁

부동산과 예금, 주식 등을 합쳐 재산이 30억원 가량 되는 60대 초반의 자산가 박승수(가명) 씨. 그의 황혼은 든든한 재산 덕택에 여유로운 일상의 연속이다.

박 씨에게는 재산 말고도 노후생활을 더욱 든든하게 받쳐 주는 파트너가 있다. 물론 30여 년을 해로해온 아내도 있지만 내심 ‘똑똑한 집사’에게 더 믿음이 간다. 집사는 다름 아닌 주거래은행의 강 팀장. 박 씨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프라이빗 뱅커(금융기관의 부자고객 자산관리 전문가)다.

박 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반드시 강 팀장과 식사 자리를 갖는다. 또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함께 골프를 치러 간다. 수십 년 친구들보다 어찌 보면 만남이 더 잦다. 강 팀장을 만나면 만사가 해결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더 자주 찾게 된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경제지식과 정보가 풍부한 강 팀장은 박 씨의 재산을 안전하게 증식, 관리해줄 뿐 아니라 잡다한 집안 일도 척척 챙겨주는 최고의 비서다. 언제 어디서든 전화를 하면 정성스레 해답을 찾아준다.

두 자녀에 대한 근심거리도 그가 해치워줬다. 서른을 훌쩍 넘긴 딸에게 꼭 맞는 신랑감을 구해줘 흐뭇하게 하더니 늦둥이로 얻은 스무 살 대학생 아들에게는 때로는 삼촌처럼 때로는 맏형처럼 살갑게 인생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 고마움에 간혹 강 팀장 부부를 불러 가족과 함께 ‘가든 파티’를 갖기도 한다. 박 씨는 강 팀장을 일러 “인생 늘그막을 즐겁게 해주는 만능 해결사이자 친구”라고 칭찬한다.

젊은 시절부터 음식점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모은 50대 초반 이수자(여ㆍ가명) 씨는 그동안 돈 버는 재미밖에 몰랐지만 요즘엔 사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평생 여유없이 살아오다 보니 장사 외에는 아는 게 없었던 그가 새삼 사는 재미를 깨달은 것은 거래은행의 프라이빗 뱅킹(PB) 센터를 통해서다.

지난 6월 한국투자증권이 압구정 PB센터 내 개선한 갤러리의 내부 모습. 가운데 전시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은 홍성일 사장이다.
그는 얼마 전 은행 담당자로부터 패션쇼 초대를 받았다. 패션쇼라면 TV를 통해서만 간혹 볼 수 있었던 별천지. 호기심이 동해 행사장을 찾은 이 씨는 그곳에서 휘황찬란한 최신 유행을 접한 것은 물론 덤으로 특별한 계층에 포함됐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거래은행의 PB센터가 이 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는 PB센터에서 열린 유명 화장품업체의 메이크업 강좌에 참석해 계절에 맞는 화장법과 피부관리법에 대한 노하우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은행에서 일부 고객만을 위해 직접 개설한 유명 화가들의 전시회 관람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 씨는 “처녀 시절 잠깐을 빼면 평생 문화생활을 모르고 살아 왔는데 은행 PB센터를 통해 다시 생활의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아 즐겁다”며 “물론 내 재산 증식과 사업장 경영 상담 등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기본”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소수의 부자 고객들을 겨냥한 금융권의 PB 서비스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국내 거액 자산가들이 부쩍 늘어난 데다 PB 시장이 한층 성숙되면서 많은 수익을 안겨주는 부자 고객들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한 은행간 전쟁의 한 단면이다.

금융권에서는 은행 수익의 80%를 상위 고객 20%가 책임진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이른바 ‘80 대 20’ 이론이다. 그중에서도 최상위 고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진다. 은행들이 VIP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는 이유다.

세계 유수의 투자기관 메릴린치는 한국의 백만장자 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또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은행권의 5억원 이상 고액 예금계좌는 약 8만여 개로 총액은 260조원이 넘는다. 은행권 전체 예금 대비 비중은 32%나 된다. 이런 점으로 미뤄 국내 PB 시장의 성장성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이처럼 크게 늘어난 부자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은행들의 PB 경쟁은 초창기 자산관리 서비스 중심에서 최근엔 생활 밀착형 서비스, 문화 제공형 서비스 등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물론 눈높이와 취향이 까다로운 부자 고객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줘 충성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의 한 프라이빗 뱅커는 “부자 고객들은 돈도 돈이지만 좀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원하는 경향이 많다”며 “고객 자산의 성공적인 관리 외에도 고객이 인생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PB 서비스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PB 서비스의 형태와 내용, 질이 동반 진화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은행들이 새로 내놓는 PB 서비스를 보면 부자 고객들에게는 그야말로 ‘서비스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서비스 외에 프라이빗 뱅커가 개인적으로 제공하는 비공식적 서비스에는 한계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기업은행은 요즘 초우량 고객을 위한 출장 서비스와 풍수 서비스로 화제가 되고 있다. 출장 서비스는 금융, 부동산, 세무ㆍ법률, 재무전략 등 4개 분야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뤄 고객을 직접 방문해 상담을 제공하는 서비스. 또 풍수 서비스는 풍수 전문가를 대동해 주택이나 공장 부지로 적합한 곳을 골라주는 서비스다. 두 가지 PB 서비스는 중소기업 경영자들에게 꽤 인기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객 자녀들을 위한 맞춤형 맞선 서비스는 이제 웬만한 은행에서는 다 제공할 만큼 일반화됐다. 신한은행은 아예 결혼정보업계에서 성사율이 높기로 소문난 전문 커플매니저를 PB센터로 영입했다. 결혼뿐만이 아니다. 고객 자녀의 교육 문제나 진로 선택, 유학 상담까지 체계적으로 제공해주는 은행도 있다. 이처럼 고객 자녀를 위한 PB 서비스는 대를 이은 고객 확보 차원의 PB 마케팅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국민은행은 헬스케어 업체와 제휴를 맺고 PB 고객을 위한 종합적인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은행의 PB 고객들은 국내 유명 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 할인 서비스를 받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응급 서비스, 치료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받는다.

이쯤 되면 PB 서비스는 금융 서비스 차원을 벗어나 고객의 생애 전반을 챙겨주는 ‘토털 케어’ 서비스로 진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한시도 고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겠다는 취지로 토, 일요일까지 PB센터를 개방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는 예치 규모를 10억원대 이상으로 높여 부자 중의 부자, 초우량 고객만을 집중적으로 파고 드는 이른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 마케팅’이 PB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아울러 자산 규모에 따른 등급화 경향에서 벗어나 고객의 직업별로 서비스를 전문화, 세분화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처럼 급변하는 PB 시장에 대해 금융권 관계자는 “조만간 국내에도 PB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최대한 고객을 많이 확보하려는 PB 서비스 전쟁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점입가경의 PB 서비스 경쟁.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부(富)의 시대’가 온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신호가 아닐까.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