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엔=800원 저지선 무너져… 정부도 방어책 없어 속앓이

꽤 오랜 기간 서울 외환시장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엔화 대 원화의 환율을 100엔=1,000원이 황금비율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 비율에 의하여 원화 대 달러화의 환율도 자연스럽게 조정되곤 하였다. 예컨대 엔화 대 달러화의 환율이 1달러=105엔이라면,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 대 달러화의 환율은 1달러=1,050원으로 수렴되는 식이었다.

이러한 ‘황금비율’은 IMF 금융위기를 겪던 1998년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2004년 말까지 별 변동 없이 꾸준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2004년 말, 국회에서 한국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실패 공방이 벌어진 것을 계기로 달러/원화 환율이 급락한 반면, 달러/엔화의 환율은 국제 외환시장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자 급기야 황금비율이 깨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엔화/원화 환율이 100엔=1,000원이라는 지지선을 무너뜨리고 속락하는 양상을 나타낸 것. 그리고 그 이후 엔화/원화 환율은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이어왔다.

그런데 최근, 2004년 말에 벌어졌던 일들이 재현되려는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엔화의 환율은 그리 크게 하락하지 않는 반면,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원화의 환율이 930원대로 주저앉는 등 속락세를 나타내자. 엔화/원화 환율이 다시 크게 내리고 있다. 즉 엔화는 원화에 대하여 연일 약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최근에는 100엔당 800원선조차 무너뜨려 790원대에 접어들면서 무려 9년 만에 최저치를 경신하였다.

더더구나 외환 시장의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엔화 환율이 추가 하락할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엔화의 환율이 하락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해외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자동차 회사 등 수출기업, 그리고 중소 수출기업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 다시 성행

엔화/원화의 환율이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다른 통화에 대하여 다소간 하락세를 나타내는 반면, 우리나라의 원화는 연일 강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엔화가 우리나라 원화에 대하여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터.

엔화가 국제 외환시장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엔화의 금리가 낮은 탓이 크다. 예컨대 달러화의 기준금리는 5.25%이고 유로존과 영국의 기준금리는 각각 3.25%, 5%이다. 그러나 일본의 기준금리는 0.25%라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기에 국제 금융자본의 입장으로서는 엔화의 낮은 수익률을 감안하여 엔화에 투자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엔화의 매수 수요가 감퇴할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결과 엔화가 약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더구나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오히려 엔화의 낮은 금리를 이용하는 거래가 성행하고 있다. 즉 낮은 금리를 이용하여 엔화를 차입하여서는 이를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다른 통화로 바꾸어 투자하는 방식이다. 이를 엔 캐리 트레이드라고 하는데, 지난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성행하였던 기법의 하나였다.

그런데 일본의 경제가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일본은행도 올해 4월, 그간의 제로금리 정책에서 탈피한다고 선언하자 엔화의 금리 상승을 우려한 탓에 엔 캐리 트레이드는 다소 주춤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콜 금리를 0.25%에서 추가로 인상할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최근 다시 엔 캐리 트레이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외환시장에서는 지난 18일과 19일에 열렸던 신흥 20개국(G20) 회의에서 작금의 엔화 약세에 대한 우려를 성명서에 포함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유로존이 일본 엔화의 약세 경향에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명서에 일언반구도 없자 시장에서는 이제 엔화 약세가 더 이상 불평의 초점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도 엔화의 약세를 막는데 소극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자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가속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늘어나게 되면, 엔화를 차입하여 이를 다른 통화로 환전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엔화를 국제 외환시장에서 매도하여야 하므로, 엔화가 매도 압력을 받아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최근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가 약세를 지속하고 있는 주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원화 환율은 연일 하락하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불거진 한국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에 따른 논란이 불씨가 된 셈.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서 환율의 안정을 위하여 개입하였으나 그 결과 수조원의 외환손실을 입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문제가 되었다.

물론 한국은행으로서는 외환시장에 개입할 경우, 필연적으로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그러한 사실이 공개되고 논의의 초점이 되면서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국회의 눈치를 보아야 할 상황. 그런데 오히려 한국은행의 이런 입장을 역이용하여 투기적인 달러 매도세력들이 서울 외환시장에 날뛰고 있다. 그런 양상은 뚜렷하다.

한국은행의 개입이 논란이 되었던 2004년도의 경우,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노린 투기적인 달러 매도 세력이 발호하면서 달러/원화의 환율은 2004년 10월 초 1,150원선에 거래되던 것이 12월 말에는 1,035원으로 무려 115원이나 추락한 바가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마다 이런 양상은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10월 초 1,040원선이던 환율이 12월 말 1,010원으로 내렸고, 올해도 역시 10월 초 947원에 머물렀던 환율이 지난주 수요일 현재 933원선으로 하락하고 있다.

물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도하는 측은 홍콩, 뉴욕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역외 투기세력뿐만은 아니다. 국내 수출기업들도 추가적인 달러 환율 하락에 따른 환위험을 헤지하기 위하여 혹은 투기적인 목적으로 달러 매도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의하면 올해 7월부터 9월까지 국내 수출기업들의 선물환 순매도 규모는 같은 기간 무역수지 흑자의 거의 5배에 이르는 135억 달러로 집계될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국내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 달러 환율에 하락 압력을 더하고 있다. 환율 하락을 막으려면 달러 매도를 자제하여야 할 것이나, 거꾸로 지금은 너도나도 달러 매도에 주력하면서 그것이 달러 환율 하락 이유가 되는 악순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對日 수출 중기 경쟁력 위기

엔화/원화의 환율이 연일 추락하고 있으니, 일본에 수출하는 기업들이나 해외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여야 하는 수출기업들은 죽을 지경이다. 특히 일본에 김치, 활어 등의 농수산물 혹은 생필품을 주로 수출해온 중소 수출업체들은 엔화/원화의 환율 하락으로 인하여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이들 중소 수출기업들이 정상적인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환율은 100엔당 800~850원선으로 조사되고 있으니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엔화/원화 환율의 급격한 하락 움직임을 방어할 만한 뾰쪽한 정책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여도 달러/원화 환율에만 개입할 수 있을 뿐, 국제 외환시장에 거래되는 엔화의 환율은 어쩌지 못한다. 그러기에 설령 달러/원화 환율이 하락세를 멈춘다고 할지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엔화의 환율이 약세를 지속한다면 엔화/원화의 환율은 추가로 하락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외환시장의 전문가들은 이미 100엔=800원이라는 심리적 지지선마저 무너진 터이어서 엔화환율은 추가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다만 내년 중반 이후 일본 경제가 뚜렷하게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게 되면 일본의 금리가 인상될 것이고, 이를 계기로 엔화가 강세로 돌아설 가능성은 있다고 전망한다. 엔화/원화 환율의 바닥이 어디일지 따지는 것은 결국 아직은 성급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김중근 메버릭 코리아 대표 jayk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