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활성화로 벤처 생태계 재편할 터"IT벤처 투자전문사 설립 12월께 투자기업 첫 공개"글로벌 경쟁서 이기려면 벤처기업도 규모 키워야"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10월 말 서울의 한 호텔에서 난생 처음 주례를 섰다. 정보기술(IT)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MIT) 교수의 아들과 김지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의 딸이 백년가약을 맺은 결혼식에서였다.

진 전 장관은 두 혼주와의 오랜 인연 때문에 양가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주례로 나섰다. 네그로폰테 교수는 1998년 삼성전자 부사장 재직 때 조언을 얻고자 MIT를 방문했을 때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고, 김 교수는 진 전 장관의 고등학교(경기고) 3년 선배다.

“미국서 온 신랑 쪽 하객들을 위해 대부분 주례사를 영어로 했지요. 처음엔 사회자도 겸해야 한다고 해서 진땀깨나 흘렸습니다. 게다가 피로연에서는 앞에 불려나가 춤까지 춰야 했어요. 허허, 참 색다른 경험을 했지요.”

주례뿐만 아니라 진 전 장관은 올해 유달리 새로운 분야에 발을 많이 들여놓았다.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5ㆍ31 지방선거 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잠시 정치 경험을 했을 뿐 아니라 이후 한국정보통신대학교와 광운대학교의 청을 못 이겨 석좌교수로 강단에도 섰다.

지난 10월 IT벤처 투자전문회사 ‘스카이레이크 인큐베스트’를 설립해 벤처 투자가로 나선 것은 새로운 도전의 정점이다. 물론 국내의 대표적인 IT전도사이자 IT분야 주무 장관을 역임한 그에게 IT는 잘 어울리는 옷과 같다. 하지만 직접 회사를 차려 IT업체에 투자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 아닌가.

“사실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다 지난 8월 지인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을 때 회사 설립에 대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진 전 장관은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 묘한 끌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처음 백두산에 오른 것은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겨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1기가 D램’과 ‘1기가헤르츠 알파칩’(당시 삼성전자가 생산한 중앙연산장치)을 천지(天池)에 바치기 위해서였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도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하게 해달라는 바람과 함께.

하지만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세찬 눈보라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신기술로 새 천년을 연다’는 소망의 글귀를 새겨 만들었던 ‘제물’(祭物)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나머지 한 개는 진 전 장관이 자택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의 회사 이름인 ‘스카이레이크 인큐베스트’도 지난 8월 두 번째 백두산 등정 때 구상한 것이다. 스카이레이크(SkyLake)를 풀어 보면 ‘하늘 호수’, 즉 천지를 의미하며 인큐베스트(Incuvest)는 인큐베이트(Incubate)와 인베스트(Invest)의 합성어로 보육하고 투자한다는 뜻이다. 합치면, 천지의 웅혼한 기상을 담아 IT벤처 기업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회사 이름인 셈이다.

진 전 장관은 IT벤처 투자에 나선 동기에 대해 “벤처 생태계를 발전적으로 재구성하고 싶어서”라고 밝힌다. 그가 보기에 국내 벤처 캐피탈은 잘 되는 업체를 키우고 안 되는 업체를 솎아내는 조정자 역할에서 부족한 면이 많다. 더욱이 IT벤처 업계 내부를 들여다보더라도 수많은 중소 기업들이 과당경쟁을 벌이는 탓에 공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가 대략 6,000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매출 300억원 이상 올리는 업체는 30여 개밖에 안 돼요. 어느 동네에 자장면 집이 하나 생기면 근처에 너도나도 자장면 집이 들어서 서로 장사가 안 되는 것처럼 국내 벤처들은 뭐가 유망하다면 모두 뛰어들어요. 안테나, LCD 분야의 경우 1백여 개 업체가 경쟁을 벌이는 현실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결국 같이 망해요.”

그는 “씨알이 너무 작은 기업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며 벤처 업계의 기업 인수합병(M&A) 활성화를 강조했다. 서로 합쳐 더 나은 경쟁력을 가진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나서서 업체 간 M&A를 적극 유도할 뜻도 밝혔다.

그렇다면 ‘진대제표’ 벤처 투자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을까. 국내 벤처 생태계 정상화는 기본이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세계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될성부른 IT벤처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벤처 캐피탈 업계가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투자, 보육, 해외진출 지원까지 한꺼번에 다해주는 회사는 드물어요. 특히 해외 네트워킹은 아주 취약한 부분이죠. 우리는 국내 중소 벤처들이 구글이나 야후처럼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줄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다섯 명의 부사장도 모두 해외 네트워크가 탄탄한 사람들로 영입했습니다.”

스카이레이크 인큐베스트 부사장단은 각각 기술, 법률, 투자, 반도체 및 디지털, 통신 분야의 전문가들로 진용이 짜여졌다. 삼성전자를 이끄는 최고경영자들을 일컫는 ‘5대 천왕’과 비슷하다고 했더니 진 전 장관은 “맞아요. 그렇게 보면 됩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들의 상호협력으로 큰 시너지를 내겠다는 복안인 것이다.

그는 조만간 인력을 확충할 계획도 밝혔다. 국내외 창업투자회사에서 최고급 실무 인력을 영입하는 동시에 경력은 짧지만 유망한 젊은 인재들도 다수 채용할 작정이다. 이밖에 상당수 전문가들로 인력 풀을 구성해 자문단이나 고문단 형태로 활용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브랜드 가치를 감안하면 ‘진대제 사단’의 외연은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스카이레이크 인큐베스트는 1호 펀드 모집을 거의 완료한 상태다. 2호 펀드 모집 계획도 세우고 있다. 법적으로 사모펀드는 하나의 기업에 펀드 총액의 1/3 이상을 투자하지 못하게 돼 있다. 때문에 ‘진대제 펀드 1호’의 투자 대상은 최소한 3개 기업 이상인 셈이다.

헌데 정통부 장관으로 IT산업 밑바닥을 3년 넘게 두루 살피는 동안 점찍어둔 기업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장관으로 있을 때는 IT산업 전체를 공정한 중재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했고 또한 장관 직무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다”며 웃어 넘겼다.

그러면서 자신이 추진했던 IT839 전략의 해당 분야 업종은 모두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IT839 전략은 8대 신규 서비스, 3대 첨단 인프라, 9대 신성장 동력 구축에 역량을 집중해 한국 IT산업을 더욱 도약시킨다는 참여정부의 정책 목표였다. 우리 생활 속으로 다가온 와이브로, DMB, 홈네트워크, 지능형 로봇 등이 그 결실들이다.

요즘 진 전 장관 사무실에는 벤처 기업인들의 전화가 적잖이 걸려 오고 있다. 자신이 보유한 기술을 소개하고 평가를 부탁하거나 투자 요청을 하는 전화들이다. 벤처 캐피탈 업계의 초보자임에도 진대제 브랜드의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장시간 기술 소개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더러 가능성이 엿보이는 신기술도 적지 않더라”고 말했다.

어쨌든 진대제 펀드의 첫 번째 투자 대상은 이르면 12월 중에 공개될 예정이다. ‘IT 조련사’가 직접 간택한 만큼 아마도 ‘준마’일 것이다. 진 전 장관은 언제쯤 가시적인 투자 성과를 낼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는 “(기업)발굴에서 명성을 얻기까지 3년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답변했다.

자신이 투자한 IT벤처가 3년쯤 뒤에는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기업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다. 그는 IT 투자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 나노기술(NT), 바이오기술(BT) 업종에도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진 전 장관에게 대표이사라는 직함은 아직 좀 낯설다. 워낙 오랫동안 장관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장관이라는 호칭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도 그를 여전히 “장관님”으로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진작부터 ‘진 대표’가 되었다. 월급날이 되면 그것을 확실하게 느낀다고 한다. “봉급쟁이일 때는 월급날을 기다리는 재미가 꽤 괜찮았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거 참, 월급날 되게 자주 돌아오네’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하하. 예전에 이건희 회장께서 ‘월급날이 다가오면 등골에 식은 땀이 날 때도 있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요즘 실감이 납니다.”

그렇다고 기업 오너 자리가 꼭 부담스럽기만 할까. ‘진 대표’는 “솔직히 월급을 준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자 보람인 것 같아요. 그거 정말 (월급을 받을 때와는) 느낌이 다릅디다.”

그는 대뜸 “우리 임직원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는 거창한 포부도 내뱉는다. 과연 어떻게 그럴까? “우리가 투자를 잘해 많은 회사들을 키우면 고용 창출은 자연히 많아지는 거 아니겠어요.”

꿈꾸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 ‘꿈도사’라는 애칭도 가진 진 전 장관. 그의 새로운 꿈과 도전은 과연 어떤 결실을 맺을지 IT업계는 지금 기대감으로 주시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