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새 둥지… 벤처의 중심축 이동벤처한국의 맥 이어갈 새내기 벤처 창업·보육에 역점 두기로

벤처기업협회가 입주한 마리오디지털타워
국내 벤처업계를 대표하는 벤처기업협회가 ‘테헤란 시대’를 막내리고 ‘구로 시대’의 막을 올렸다.

벤처협회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 한국기술센터에서 구로구 구로동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마리오디지털타워로 사무국을 이전했다. 1995년 창립 이래 벤처 요람으로 불리는 이른바 테헤란밸리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벤처협회는 이로써 새로운 시대를 구로에서 열어가게 됐다.

벤처협회의 테헤란 시대는 한국 벤처산업의 성장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80년대 창업한 1세대 벤처의 뒤를 이어 2세대 벤처의 저변이 점차 확산되던 무렵에 설립돼 90년대 후반 벤처 열풍, 2000년대 초반 거품 붕괴 이후의 한파, 그리고 2005년부터 진행된 벤처 부활까지 벤처산업의 부침을 오롯이 함께 해왔다.

벤처기업들이 테헤란로 근처에 산업 벨트를 형성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돈’ 때문이었다. 기술은 있지만 자본이 없는 창업 기업들이 사업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투자기관과 금융기관 등이 밀집한 강남 지역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벤처산업 비약적 발전 이끌어

하지만 냉정한 자본주들이 막 걸음마를 뗀 신생 기업들에게 만만할 리는 만무했다. 때문에 테헤란로에 둥지를 튼 당시 벤처기업인들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벤처기업의 경영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술과 패기밖에 없는 그들에게 담보 없이 투자를 받는 것은 사활을 건 과제였다.

벤처협회는 그런 고민 끝에 업계의 여러 난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한 구심점으로서 자연스레 탄생했다. 당시 협회 설립 과정에는 이민화(메디슨), 이찬진(한글과컴퓨터), 조현정(비트컴퓨터), 변대규(휴맥스), 장흥순(터보테크) 등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 사이 창업한 벤처 1, 2세대의 스타급 경영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벤처협회가 전면에 나서면서 국내 벤처산업 발전을 위한 주춧돌도 차례차례 놓여졌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벤처’라는 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은 정부가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벤처특별법) 제정, 코스닥 시장 개설, 스톡옵션제 도입, 대학 실험실 창업 허용 등 벤처 친화적 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

이에 따라 90년대 후반부터 불과 2, 3년 동안 벤처업계는 비약적인 도약을 일궜다. 코스닥 시장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벤처기업 숫자는 1만 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일부 벤처인들이 연루된 게이트와 스캔들에 이은 거품 붕괴의 결과는 참담했다. 젊은 인재들은 빠져나갔고 국민들은 외면했다. 이때 벤처산업 부활의 선봉에 선 것도 벤처협회였다. 정부, 국회 등을 쫓아다니며 벤처 중흥을 설득한 끝에 마침내 2004년 말 벤처활성화 대책 발표를 이끌어냈던 것.

이처럼 벤처협회는 테헤란 시대 10여 년 동안 정부와 업계의 가교를 맡으며 벤처산업이 질주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시절 협회의 주된 임무는 정부의 벤처 정책 생산에 브레인 역할을 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 사이 벤처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거품 붕괴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오히려 옥석이 가려지면서 우량기업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신생 벤처의 창업 열기도 회복되고 있다. 2004년 말 8,000여 개에 그쳤던 벤처기업은 지난해 말 1만2,500여 개로 늘어나 벤처 열풍의 정점이었던 2001년 1만1,000여 개 수준을 가뿐히 넘어섰다.

또한 지난해 국내 벤처기업들은 총 매출 100조원을 넘어서며 벤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벤처업계 평균 업력(業歷)이 10년도 채 안 되는 터에 100조원 매출을 올린 것은 해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평가다. 아울러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벤처기업들을 뜻하는 ‘1,000억원 클럽’의 회원사도 78개나 됐다. 특히 휴맥스의 경우 2년쯤 뒤에는 최초의 ‘1조원 클럽’ 가입도 가능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이런 터에 벤처협회가 정든 테헤란밸리를 떠나 낯선 구로로 둥지를 옮긴 것은 단순한 이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는 협회의 이정표를 바꾸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동안 국내 벤처산업 성장을 위해 맨 앞에서 활로 개척에 주력했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부터는 뒤따라오는 신생 벤처들의 길라잡이가 돼 벤처 기반을 다지는 데 더 힘쓰겠다는 것이다.

구로지역에 벤처기업 300여 개 포진

구로 지역을 선택한 것은 그 다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우중충한 이미지의 구로공단에서 벗어나 지식기반산업의 거점으로 거듭나고 있는 구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는 요즘 벤처 창업 열기가 뜨겁다. 또한 저렴한 비용으로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형 공장도 많이 들어서고 있어 소규모 벤처기업들에게는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구로구와 금천구 경계 지역 일대에 조성되고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중심으로 포진한 업체 숫자는 약 5,500~5,600개로 추산된다. 대부분 중소기업들로 이 가운데 벤처기업은 약 2,000개에 달한다.

이런 까닭에 구로 시대의 벤처협회가 가장 역점을 두게 될 사업은 다름아닌 신생 벤처 보육이다. 이를 위해 1,500평의 새 터전은 사무국을 빼고는 대부분 창업 보육을 위한 공간으로 확보돼 있다.

이곳에는 25개 기업을 유치해 경영, 마케팅 기법 등 회사 운영 노하우를 제공할 계획이다. 입주 대상은 주로 정보기술(IT) 소프트웨어 분야의 소규모 벤처들로 막 창업했거나 아직 걸음마 단계의 기업들이다.

이와 관련, 벤처협회 오완진 부장은 “지난해부터 협회의 사업은 기업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경영 내실화 프로그램으로 상당 부분 전환됐다”며 “구로 지역으로 협회를 옮긴 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생 벤처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창업 보육 사업을 해보자는 뜻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벤처협회는 지난 10여 년의 성과를 토대로 소규모 신생 벤처들을 육성하는 데 향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로운 성공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이공계 청년학도의 희망을 키우고 작은 기업들에게는 미래 비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벤처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청사진이다.

구로 시대를 연 벤처협회가 앞으로 그려나갈 내일의 벤처 지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벤처기업회 새 사무실 입구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