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국, 아세안경제공동체 2015년까지 조기에 창설키로 합의회원국 이질성 극복 등 난제 많아… 중·일, 주도권 다툼도 치열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제2의 유럽연합(EU)이 될 수 있을까.

12~15일 필리핀 세부에서는 아세안 10개 회원국 간의 아세안정상회의와 여기에 한국, 중국, 일본이 참가한 아세안+3 확대정상회의, 그리고 여기에 다시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포함된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계속해서 열렸다.

中의 '아세안정상회의 확대안' 美서 견제

연이은 회의의 핵심은 아세안이 동남아라는 지역에서 벗어나 동북아, 서남아까지 아우르는 지역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즉, 동아시아라는 이름으로 EU에 버금가는 정치ㆍ경제 공동체로 재탄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였다.

사실 EAS의 처음 구상은 아세안+3, 즉 아세안 회원국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등 13개국만으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아세안+3 확대정상회의는 아세안 정상회의에 한국, 중국, 일본 동북아 3국이 초청되는 형식을 띤 것이기 때문에 한·중·일 3국이 강한 소속감을 갖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13일 강력한 반테러 조치 채택 움직임에 성조기를 불태우며 항의시위를 벌이는 필리핀인들. <세부=AP 연합>
따라서 한·중·일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이들 3국 수도에서도 정상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체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EAS 구상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동아시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낀 데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세안+3을 EAS로 확대하는 것을 주도한 중국 정부는 내심 이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다자간 혹은 양자간 촘촘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의 입김을 배제시켜 보자는 정치적 속셈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미국을 고립시키는 데 안성맞춤이라는 판단한 것이다. 중국이 EAS를 주창하면서 내세운 모토도 ‘동아시아는 동아시아의 손에’라는 것이었다.

이런 중국의 공작을 가만히 두고 볼 미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나올 때부터 “앞으로 지켜보겠다” “무엇을 지향하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의도를 물타기하려는 외교 총력전을 펼쳤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수족’인 일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역시 안보면에서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끌어들임으로써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를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격적인 맞불작전을 펼쳐 호주, 뉴질랜드, 인도 3국안을 관철시켰고, 16개국으로 2005년 12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첫 EAS가 개최됐다.

중국이 ‘동아시아’ 주도권 경쟁에서 일본에 일단 패한 데는 아세안 회원국들의 반 중국정서도 한몫했다. 아세안 회원국 내부에 깔려있는 일종의 ‘중국 위협론’이었다. 말레이시아와 함께 아세안의 맹주를 자처해온 인도네시아는 화교경제권인 말레이시아와 달리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왔다.

강대국 간 세력균형을 외교기조를 삼고 있는 싱가포르, 중국과 전쟁까지 치른 베트남도 중국의 부상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독주를 반대하는 이들 회원국의 정서와 일본, 미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2년마다 열리는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의체(APEC)로 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동아시아’라는 구도를 좌절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국의 동맹국을 대거 포함시켜 동아시아의 색깔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EAS의 목표는 동아시아공동체(EAC)의 창설이다. 무역과 투자 등 경제분야에서 통합을 추진하고 궁극적으로 EU와 같은 정치ㆍ경제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구상이 나오게 된 데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커졌고, 또 EU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통합이 가속화하는 데 대한 위기의식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 구상이 중국과 미국, 중국과 일본의 동남아에 대한 주도권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양자 및 다자 간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한 경제통합과 민간분야의 참여까지 강력 주장하는 중국과, 기능적 협력만을 강화하고 오히려 APEC을 활성화하면서 EU와 같은 통합은 장기적 과제로 넘기자고 하는 일본의 입장이 충돌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경제규모, 종교, 정치체제 등 천차만별

이번 회의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아세안의 환심을 사기 위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중국은 아세안과 서비스무역협정에 서명해 7월부터 이를 발효시키기로 해 중국-아세안 간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2005년 7월부터 아세안과 화물무역협정을 시행해 7,000여 종의 상품에 대한 관세를 낮춘 중국은 2010년까지 아세안과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중국은 또 남부 윈난(雲南)성의 성도 쿤밍(昆明)에서 싱가포르까지 연결하는 범 아시아 철도 네트워크도 추진 중이다. 중국에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을 거쳐 싱가포르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완공된다면 경제적 파급효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일본도 ‘일본 에너지 이니셔티브’를 발표해 발전소 정비 등에 20억 달러 규모의 해외개발원조(ODA)를 제공하고 에너지 협력창구로서 ‘아시아ㆍ에너지 절약 협력센터’를 설치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각종 연구를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세안 10개 회원들은 12, 13일 열린 정상회의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당초 2020년까지로 했던 아세안경제공동체(AEC) 발족을 5년 앞당겨 2015년까지 실현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를 위한 헌장 마련에도 한목소리를 냈다. 중국과 인도의 경쟁력이 날로 커져 역내 통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아세안이 이 같은 공동체를 추진할 만한 자체 동력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아세안의 고질적인 문제, 즉 회원국 간 천차만별인 경제규모, 정치이념, 민주화, 종교 등 결속을 저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아세안이 출범한 1967년부터 지금까지 제기돼온 문제여서 이에 대한 구심력을 확보하지 못하고는 공동체 구상은 탁상공론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제 아세안은 이 같은 회원국 간 이질적 요소를 고려해 회원국 간 내정에 대한 철저한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 불간섭 원칙이 아세안을 40년 동안 존속하게 한 힘이 됐던 것은 분명하지만 EU와 같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간섭 원칙은 하루빨리 극복돼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