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위한 종자돈 운영·여유자금 마련 등에 도움… 노후 '안전댐' 역할

40대 후반의 가장 Y씨. 중소기업에서 과장 자리에 있을 때는 그래도 세상에 겁날 게 없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정리해고 소문이 나돌자 맨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람도 그였다.

아직도 젊은데 뭘 못할까 하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봉고차 신발가게, 노점 꼬치 판매, 프린터 소모품 배달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벌이로는 네 식구의 생계비를 대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큰아들의 학원비를 내고 노모의 용돈까지 드리고 나면 미래를 위한 저축은 도저히 꿈도 꿀 수 없었다. 변변한 보험 하나도 들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단순히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디스크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았다.

무능한 남편이라고 비난한 아내는 이혼하겠다며 친정에 내려갔다. 이제 노모의 밥상을 차리는 것조차 병든 그의 몫이 되었다.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살풍경이다.

재무설계라는 '안전댐'을 마련하자

이처럼 한 가정의 주 소득원인 가장이 어느 날 직장을 잃고 갑작스럽게 실업자 신세가 되면 당장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진다. 이는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남편의 탓일까, 아니면 평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내 탓일까.

누구의 탓도 아닐 수 있지만 동시에 남편과 아내 모두의 책임일 수도 있다. 두 사람 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두 사람 모두의 잘못일 수 있다.

사오정(45세에 정년)이라는 말에서 보듯 40대 중년층의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외환위기 한파로 늘어난 40대 실업자들은 지난 2년간 감소세를 보이다가 최근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그만큼 40대가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정부는 청년실업문제 해결만 신경쓰다보니 40대의 실업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다.

우리 시대에 40대는 어떤 존재인가.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사교육비 부담이 만만치 않고, 내 집을 마련하느라 은행에서 적지 않은 돈을 대출받았고, 나아가 현직에서 은퇴한 노부모들을 봉양해야 할 팍팍한 나이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에다 자신의 노후도 준비해야 해야 한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에 선견지명을 갖고 미래를 준비했다면 40대에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막막하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한숨만 쉬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 40대 나이에 재무설계가 절실한 이유다.

재무설계는 종자돈을 불려 잘 먹고 잘 살자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만일에 닥쳐올 불행을 대비하기 위한 ‘안전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안전댐 구축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높은 수익률은 시간이 가져다준다

아직도 재무설계라고 하면 그저 좋은 재테크 상품 하나를 추천받아 높은 수익을 올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재무설계의 핵심은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상품은 그저 거기에 맞추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계획한 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크다.

‘시간의 마법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환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해리포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시간의 힘을 믿고 준비하고 기다려 돈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우리 자신에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시간의 마법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내가 모아둔 저축 총액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보자. 그리고 그 저축을 세 부류로 나누자. 지금 쓸 돈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써야 할 돈, 그리고 아직은 특별한 목적 없이 쌓아두고 싶은 돈으로. 그런 다음 재무설계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내게 맞는 적절한 상품도 전문가가 골라주는 게 좀 더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무턱대고 전문가와 상담하기보다는 그 전에 저축 총액을 파악하고 찾아가야 한다.

'지금'을 위해 '먼 훗날'을 소비말자

어떤 돈이든 목적이 변할 수 있다. 만약 노후자금으로 준비했던 돈을 자녀의 학자금으로 다 써버렸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쩔 수 없었다’며 손을 털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물론 처음부터 담는 바구니를 다르게 해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절대 바뀌지 말아야 할 바구니를 구분해 놓았다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다고 씨감자까지 먹어버리면, 다음 파종기 때 당장 문제가 생긴다. 재무설계도 마찬가지다. 어리석게 미래의 용도를 무시하고 미리 당겨쓰면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된다.

요즘40대 가장들이 노후자금 마련에 고민하는 것도 모두 이 씨감자를 홀대했기 때문에 맞이한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언제 내게 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해 어렴풋이 대처하고 방관했던 결과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절대로 ‘지금’을 위해 ‘먼 훗날’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

‘먼 훗날을 위한 자산’은 조금 공격적으로 운용해도 좋다. 시간이 많다는 것은 위험을 껴안아도 그만큼 그것을 상쇄할 만한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직접 주식에 투자할 수도 있고, 공격적인 주식형펀드에 가입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축과 투자 중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쪽에서 수익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자산을 좀 더 안정적인 쪽으로 옮겨 위험을 줄여 나가면 된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한 ‘중장기에 써야 할 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오히려 이 돈은 잘게 쪼개어 목적별로 다르게 두는 편이 유리하다. 자녀의 학자금이든, 남편의 사업자금이든, 주택자금이든 순차적으로 수익이 나는 쪽에서부터 꺼내 쓴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순서상 가장 먼저 구분지어야 할 일이지만- ‘당장 사용해야 할 돈’을 계획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사용해야 하는 이 자금은 꼭 잘게 나누지 않더라도 용도를 분명하게 하면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시로 입출금할 때 수수료가 얼마나 붙는지, 통장에서 잠자고 있는 단 며칠 동안이라도 이율이 얼마나 되는지, 세금우대 혜택은 있는지 등을 따져봐야 한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라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동시에 그 많은 정보 중에 옥석을 가려내지 않으면 오히려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할 지경이다.

스스로 정보를 취합해 쓸 만한 것들을 한 줄에 꿰어 나의 지식으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올바른 정보를 판단해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를 가까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마법의 시간’을 통제하는 데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하는 부류이다. 급한 불부터 끄려고 계획 없이 소비하고, 미래의 가치를 당겨서 사용한다면, 그것을 복구하기까지는 곱절의 시간과 노력이 들 게 불 보듯 뻔하다. 결국 행복은 사라지고 고행의 노후가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재무설계란 ‘시간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꿈을 수치화하고 목표를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40대 가장들은 당장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지금 미래를 위한 재무설계를 하고 있는가.




조경현 케이리치㈜ 자산운용 연구원 zanian3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