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소비국 중국 등 수요 급증… 최고가 경신 가능성도현대 산업에 쓰임새 많아… 한국 자족률 개선 서둘러야

국내 최대의 동가공업체 풍산의 제품생산 라인.
우리나라 화폐 발행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은행이 최근 동전 때문에 적잖은 고민을 하고 있다. 10원짜리에 이어 100원과 50원짜리 동전의 재료인 금속 소재 가격도 액면 가격을 웃도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발권 당국으로서는 당장 손해를 감수하며 동전을 발행할 수밖에 없고, 중장기적으로는 동전의 크기 축소나 소재 변경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할 터.

동전의 제조원가가 발행 가격을 넘어서는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은 동전 재료인 구리 등 금속 가격이 최근 국제 원자재시장에서 가파르게 치솟은 탓이다. 구리는 100원짜리 동전 재료의 75%, 50원짜리 동전 재료의 70%를 차지할 만큼 동전 주조의 핵심 소재다. 구리는 2000년엔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톤당 2,000달러선에 거래됐으나 2004년 3,000달러를 돌파한 뒤 지난해에는 무려 8,000달러까지 치솟았다.

중국 등 수요 갈수록 폭증

지난해 5월 톤당 8,790달러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던 구리 가격은 이후 다소 진정 기미를 보이는 듯하다가 올해 4월 또다시 8,000달러를 넘으며 요동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리 가격이 이런 추세로 가면 최고가 경신을 넘어 1만 달러까지 오를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구리 가격이 급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제 시장에서 공급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는 게 1차적인 원인이다. 세계 조사기관들이 내놓은 연도별 구리 수급 현황에 따르면 구리의 수요 초과는 2003년 41만9,000톤에 달한 이후 5년째 계속되고 있다. 올해도 전 세계적으로 10만8,000톤 가량의 수요 초과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처럼 구리 수요가 넘치는 것은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회복세에 맞춰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수요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신흥시장의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신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최대의 구리 소비국인 중국의 수요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중국 세관 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 중국의 구리 수입량은 총 30만7,740톤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이에 따라 1분기 구리 수입량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8%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2005년 기준 336만3,000여 톤의 전기동(구리 원석인 동정광을 제련해 얻은 구리 제품)을 사용해 전 세계 소비량의 20%를 차지했다. 중국은 칠레에 이어 세계 2위의 전기동 생산국이지만 워낙 수요가 많아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고 있다.

향후 수급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중국이 1조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를 풀어 구리 등 주요 원자재를 대거 사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만약 원자재 블랙홀인 중국이 막대한 달러를 이용해 구리 비축에 나선다면 구리 시장의 불안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구리 시세에 편승해 차익을 챙기려는 국제 투기세력이 밀려드는 것도 구리 가격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구리를 투자처로 삼은 원자재펀드 출시도 잇따르고 있어 가수요에 따른 가격 오름세는 한동안 꺾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IT 산업 등에 다양하게 사용

구리는 인류가 가장 먼저 이용한 금속일 만큼 활용 역사가 오래됐다. 광석에서 추출하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해 고대 시대에 이미 청동기 형태로 문명 발전의 한 축을 이뤘다. 산업혁명 이후 각종 기계용 재료나 전선 재료로 널리 활용됐으며 20세기엔 제련 및 가공기술의 발달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구리는 열 전도성과 전기 전도성이 은(銀) 다음으로 우수한 금속이다.

특히 전기 전도성은 철보다 5배, 알루미늄보다 1.5배, 아연보다 3배나 높다. 게다가 전성(얇게 펴지는 성질)과 연성(가늘고 길게 늘어나는 성질)이 뛰어나 가공하기에 매우 용이하며 부식에 견디는 내식성도 탁월하다. 또 다른 금속과 섞여 새로운 성질을 갖는 합금용으로도 적합하다.

이런 다양한 특성과 장점 덕분에 구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용도로 쓰이며 산업 발전을 돕고 있다. 전기전자 부품, 건축 내외장재, 자동차 부품, 반도체 리드프레임, 가스 및 급수를 위한 건축배관, 공기조화용 배관, 선박이나 발전설비의 재료, 밸브 볼트 너트 등 각종 기계 부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에 쓰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유일의 동제련 업체인 LS니꼬동제련 자료에 따르면 구리의 용도별 사용 비중은 전기전자 분야 36%, 건설 분야 25%, 수송기기용 14%, 산업기계용 12%, 기타 소비재 13%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IT산업에서 구리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내 최대 동가공 업체인 풍산 관계자는 “한때 동파이프가 인기를 끌면서 ‘동관’ 제품이 많이 팔렸는데 요즘에는 IT산업이 성장하면서 ‘동판’ 제품의 매출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구리는 반도체 산업에서도 첨단 공정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세계 반도체 업계는 최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나노 공정’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이 공정에서는 회로 간 배선 연결 소재로 기존의 알루미늄 대신 구리를 사용하는 추세다. 구리가 알루미늄보다 전기 전도성이 훨씬 높아 보다 완전한 반도체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구리광산 개발 나서

구리의 쓰임새는 이처럼 갈수록 많아지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구리를 개발해 사용하는 비율을 뜻하는 ‘자주개발률’은 2006년 현재 0.3%에 불과하다. 국내 구리 수요의 99.7%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 구리 수급 상황에 매우 취약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구리 독립’을 위한 해외 구리광산 개발 붐이 서서히 일고 있다. 대한광업진흥공사는 올해부터 10년 동안 총 24억 달러를 투자해 2016년까지는 구리 자주개발률 35%를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LG상사, SK네트웍스, 삼성물산 등 민간 기업들도 컨소시엄 형태로 적극 참여한다.

민관합작 구리개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16년에는 총수요량 127만 톤 가운데 45만 톤을 우리 손으로 자급할 수 있게 된다. 구리 자원이 전혀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공급 기반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21세기는 자원전쟁 시대다. 구리는 그중에서도 전략 광물로서 가치가 높아 세계 각국의 확보전이 치열하다. 구리 빈국인 우리로서는 한 발 더 뛰어 앞서가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