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만 추격 따돌리기 위한 국내업체 상생 협력8세대 LCD 유리기판 크기 표준화 등 사실상 성과패널 상호 교차구매는 시급히 풀어야 할 현안 지적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은 1990년대 중반 처음 세계시장에 이름을 알린 뒤 불과 10여 년의 짧은 기간에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끝에 세계 최고 자리에 올랐다.

2000년에 대뜸 세계시장 점유율 30%를 돌파해 경쟁국을 긴장시키더니 불과 5년 뒤인 2005년에는 40% 고지마저 점령했다. 이 기간에 일본은 디스플레이 왕좌를 한국에 내주고 뒤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지난해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의 생산 규모는 310억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260억 달러 어치를 해외에 내다팔아 확고한 주력 수출산업의 위상을 과시했다.

LCD(액정표시장치),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OLED(유기발광 다이오드) 등 3대 디스플레이 분야에 걸쳐 고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자랑거리다. 지난해 기준 세계시장 점유율은 LCD 36.3%, PDP 52.7%, OLED 39.9% 등으로 모두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의 황금기가 얼마나 더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방심하면 언제든지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경쟁국의 추격이 점차 거세지고 있어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의 역공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실력을 기른 대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대만은 세계시장 주도권을 놓고 한국을 턱밑까지 바짝 따라붙고 있다. 여기에 후발주자인 중국의 도전장도 멀지 않아 판도를 뒤흔들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때문에 국내 업계에서는 “대규모 투자와 기술개발 경쟁에서 자칫 실기(失機)라도 하게 되면 경쟁국에 시장 주도권을 내주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사실 이런 위기감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해가 떠 있을 때 우산을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져야 언젠가 닥칠 화를 사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의 동반성장을 기치로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이하 협회)가 출범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 동안 삼성과 LG라는 두 재벌그룹을 중심으로 나뉘어 불꽃 튀는 ‘내전’을 벌여 왔던 업계가 밀려오는 ‘외세’ 앞에서 말 그대로 대동단결을 선언한 것이다.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은 협회 출범 즈음에 “삼성과 LG가 손을 잡은 것은 한국과 일본, 대만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맺어진 현대판 도원결의와 같다”고 치하하기도 했다. 그만큼 경쟁국의 추격전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업계의 결속은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당시 출범식에는 삼성전자, LG필립스LCD(이상 LCD업체), LG전자, 삼성SDI(이상 PDP업체) 등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의 ‘빅4’ 대표들이 나란히 참석해 ‘8대 상생협력 과제’ 실천을 통한 동반발전 전략에 합의했다. 상생협력 과제는 특허 협력, 수직계열화 타파, 공동 연구개발 등을 핵심으로 삼아 삼성, LG 등 대기업은 기술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중소기업은 핵심 장비, 부품, 소재 분야의 국산화율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포석을 깔았다.

이 같은 내용은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의 해묵은 과제와 폐단을 해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기대감을 낳았다. 반면 일각에서는 과연 잘 될까 하는 기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세계 1위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온 삼성과 LG가 쉽사리 융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통념이 작용했다. 협회 출범에 대해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억측만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6개월여가 지난 현재, ‘디스플레이 도원결의’는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을까. 당초 취지처럼 동반발전의 초석을 놓았을까, 아니면 우려한 대로 지지부진한 성과를 내고 있을까.

업계에 따르면 협회 출범 이후 지금까지의 ‘상생 성적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반년을 조금 넘긴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청신호를 켰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8세대 LCD 유리기판 크기를 사실상 표준화했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LG필립스LCD는 8세대 라인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기판 크기를 삼성전자와 동일하게 할 것임을 선언했다. 협회 출범 당시 주요 공약 중 하나이자 난제 중의 난제였던 과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이다. 그 동안 삼성과 LG측은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차세대 라인 증설에 나설 때마다 유리기판 크기를 달리 해왔다.

이를 발판으로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는 장비와 재료를 교차 구매하는 데도 합의를 이끌어냈다. 두 패널 대기업의 고유기술이나 자금지원을 받아 협력업체가 개발한 일부 장비, 재료를 빼고는 모든 품목에 대해 교차 구매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두 대기업과 수직계열화 관계에 있던 대다수 중소기업들이 어느 쪽으로든 납품을 할 수 있게 돼 판로가 크게 확대됐다. 실제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는 각각 상대 협력업체의 장비를 구매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교차 구매가 이뤄짐에 따라 국내 장비업체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됐다는 평가다. 외국 LCD 패널기업들이 8세대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 해외시장 공략 기회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 앞에는 아직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만만치 않게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패널의 상호 교차 구매는 하루빨리 풀어야 할 숙제라는 지적이다.

대만 국립공업기술연구원(ITR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 LCD TV의 49.9%, LG전자 LCD TV의 27.1%가 대만산 패널을 채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계적으로 LCD TV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패널 공급량이 달려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결국 대만 업체들의 배만 불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두 대기업이 패널을 국내에서 공급받아 TV를 만들면 물류비 등 원가를 크게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경쟁국인 대만을 견제할 수 있을 텐데 현실적인 여건이 그렇지 못한 형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업계가 동반발전에 대한 로드맵을 스스로 그려나가고 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본격적인 행보는 이제부터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적과의 동침’이라는 꼬리표를 확실히 떼고 성공적인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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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