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금호아시아나, 대한통운 인수 놓고 한치 양보없는 자존심 싸움금호에 재계순위 밀린 한진 1조 5,000억짜리 기업 삼켜 랭킹 재역전 성공할까 관심

"노무현(대통령)이 호남 민심을 잡으려면 그 정도(대우건설)는 줘야 되는 거 아닌감?" 2006년 초 광주. 업무상 지방 출장이 잦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광주에 들렀을 때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다름 아닌 '대우건설이 대표적인 호남 기업인 금호에게 넘어 올 것'이라는 소문.

당시만 해도 '큼지막한' 매물 중 하나였지만 대우건설에 대한 M&A(인수합병) 얘기가 구체적으로 오가던 시기가 아니어서 이 관계자는 반신반의했다. "무슨 소리? 그게 말이 되냐?"고만 생각했다는 것.

하지만 '한 두 명도 아니고 만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더라'고 그는 전한다. "민주당을 '해체'시킨 노 대통령이 호남 정서를 달래기 위해서 그것(대우건설)을 줄 것"이라는 논리에서다.

그리고 지난 해 하반기 대우건설은 유력 주자로 거론됐던 프라임그룹, 유진그룹 등을 건너뛰고 금호아시아나에 넘겨졌다. 이 관계자는 '이렇게 가는 수도 있나 싶더라'며 앞서 들었던 풍문에 지금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커다란 기업의 공개 입찰 과정이 대통령 한 사람이나 일부 세력의 힘에 의해 좌우될 수도 없을 뿐더러 공정한 경쟁규칙과 시장원리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에 이의를 다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지난해 말 기준(공정위)으로 금호아시아나(자산 22조8,700억원)는 재계 7위에 오르며 라이벌 한진그룹(22조2,200억원)을 앞서고 있다. 1년 전인 2005년 11위였지만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덩치가 커지면서 역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금호아시아나는 여세를 몰아 내년 초 M&A 시장의 최대어로 꼽히는 대한통운 인수까지 노리고 있다.

금호아시아나의 이 같은 '거침없는 질주' 바로 맞은 편에 숙명의 라이벌 한진그룹이 나섰다. 한진그룹 역시 대한통운 인수추진을 천명하며 입찰에 뛰어든 것. 대한통운 매각주관사인 매릴린치 등은 2008년 1월4일까지 예비실사를 거쳐 1월 중순께 최종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재계의 두 라이벌이 대한통운이라는 '한 마리 먹이감'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됐지만 두 그룹이 처한 상황은 사뭇 다르다. 금호아시아나가 그동안 대우건설 인수 등 외형상 고공 질주를 계속한 것에 비해 한진그룹은 상대적으로 '정중동의 행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저가항공사업 진출문제를 둘러싸고도 두 그룹 계열사 간에 미묘한 기류가 오가고 있다. 대한항공이 야심 차게 추진해온 저가항공사업이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려 주춤하고 있는 데 반해 동종업계의 아시아나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교통부는 '신생 항공사가 국제선에 취항하기 위해서는 국내선을 2년간 2만편 이상 사망사고 없이 운항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지난 11월 확정ㆍ 발표했다.

때문에 대한항공은 자체 출자한 저가항공사라도 별개의 신생 항공사로 간주돼 다른 항공사와 마찬가지로 2년 후에나 국제선을 띄울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런 가운데 아시아나는 아예 저가항공사업 추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은 최근 대한항공의 저가 항공사 설립에 대해 대놓고 "우리는 그런 거에 별로 관심 없다. 왜 우리가 그걸 하느냐"고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은 "아시아나는 우리와 달리 당장 저가항공 사업에 나설 인적, 물적 여유가 없는 모양"이라고 말하고 이를 전해 들은 아시아나는 '어이없다'며 맞받아 치는 등 양 사 관계자 간에 가시 돋친 말이 오가고 있다.

두 회사는 최근 보도자료 발표시점을 놓고 또 한 바탕 신경전을 벌였다.

아시아나항공이 12일 자사의 항공동맹체인 스타얼라이언스에 대한 보도자료를 낸 직후 공교롭게 대한항공이 마일리지 유효기간 설정 방침을 발표한 것. 기업 홍보에 도움이 되는 좋은 뉴스를 알릴 기회라고 생각하던 아시아나항공 측은 대한항공의 뉴스가 오히려 더 언론의 조명을 받자 '물타기'라며 격앙했다.

때문에 대한통운 인수를 놓고 벌이게 된 두 그룹간의 이번 결전이 더욱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진, 금호아시아나 중 어느 그룹이 인수하느냐의 승패 문제도 있지만 인수 이후 재계 순위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통운의 자산 규모는 대략 1조5,000억 원.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재계 순위에서 금호아시아나가 한진을 불과 6,500억 원 앞서고 있어 대한통운이 한진그룹에 넘어간다면 순위는 역전되게 된다. 반대로 금호아시아나가 차지하면 재계 랭킹 간격을 더 벌리게 되는 상황.

대우건설 인수 전까지만 해도 오랜 기간 한진그룹이 금호아시아나보다 외형적 우위에 있었고 최근 들어 상황이 역전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 그룹의 순위 쟁탈전이 얼마나 치열할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부동의 7위였던 한진그룹은 금호아시아나에 밀려 8위로 랭킹된 이후 정유업체인 S-Oil의 지분을 인수하며 수치상으로 다시 금호아시아나를 따돌렸다.

하지만 공정위 발표 자료에는 아직 한진그룹의 S-Oil의 지분 인수 부분이 반영돼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8위다. 한진그룹과 금호아시아나 측은 "순위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덩치보다는 수익성에 더 관심이 있다"고 일견 태연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두 그룹은 대한통운 인수와 관련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결의를 내비치고 있다.

그동안 내실위주의 조용한 행보를 보여온 한진그룹이 오랜만에 큰 싸움에 뛰어든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올 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일부 언론에 "대한통운 인수에 참여한다고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며 묘한 여운을 남긴 바 없다.

조 회장은 당시 "대한통운 인수에 나선다면 그 주체는 대한항공이 아니라 한진이 될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 말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형국이다. 한진그룹은 대한통운 인수를 위해 음양으로 많은 공을 들여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아시아나는 "대우건설보다 더 눈독을 들여 온 것이 대한통운"이라며 물류와 레저가 그룹의 향후 주력사업이 되는데 대한통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삼구 그룹회장이 최근 '한진은 (인수전에서) 강한 상대다'라고 말한 내용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자 그룹측이 적극 해명(?)에 나선 것 자체가 대한통운을 둘러싼 두 그룹 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웅변한다.

금호아시아나측은 "기자가 한진을 지명해 물어 보니까 원론적으로 상대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얘기한 것일 뿐이지, 한진이 인수전에 뛰어든 기업 중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에 강하다고 (먼저 거명하며) 언급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한진그룹을 강력한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력의 한진그룹이 오랜만에 대형 펀치를 날려 역전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김대중 정부 이래 고속 질주해온 금호아시아나가 노무현 정권말기까지 여세를 몰아갈 것인지, 대한통운 인수전에 있어서 재계의 관전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