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 발언으로 경제심리 악화… 향후 국제유가·미국 주택경기 등 눈여겨 봐야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발언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향후 국제유가의 움직임이 또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 사진은 한국기업 예당 에너지의 러시아 유전개발 현장.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위원회(FRB) 의장은 재임 시절 금융정책이나 전반적인 경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힐 때면 어김없이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이자율이 크게 오르거나 내리고, 주식 가격과 채권 가격이 요동을 치는 등 파장이 컸으므로 시장에 영향을 미칠만한 단정적인 표현을 쓸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들리고, 저렇게 해석하면 또 그렇게도 들리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일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금융정책을 쥐고 흔들던 막강한 ‘금융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린스펀 전 의장은 비교적 자유롭게 경제와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놓고 있다.

물론 현재 그는 더 이상 미국의 금융정책을 좌우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여전히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그의 발언을 통해 미국 금융정책의 방향을 점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린스펀이 최근 ABC 방송에 출연하여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초기징후를 드러내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냉전시대 이후 인플레이션 압력이 낮은 시대를 구가했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나가고 있으며, 그렇게 된 것은 미국의 생산성 증가 둔화와 중국의 수출물가 상승이 주된 이유”라고 발언하여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발언이 전해진 12월14일 미국의 주식시장은 크게 하락하였으며 또한 우리나라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주식시장도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로 말미암아 큰 폭의 약세를 나타내었다.

물론 아직까지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는 것이지 확정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은 그저 가능성이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식시장에 커다란 악재가 된다. 그러니 만일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경제에 미칠 악영향이 어떤 수준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란 경기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합쳐진 말로서 문자 그대로 물가는 오르지만 경기는 되려 침체국면에 접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활황을 나타내면 물가도 오르기 마련이고, 반대로 경기가 침체되면 물가상승세는 주춤거린다. 그런데 스태그플레이션은 물가는 물가대로 오르면서도 정작 경기는 살아나지 못하는 일이므로 경제로서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은 1970년 미국에서 유가가 크게 오르고, 그 결과 경기 침체와 물가 급등 양상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오르고 있는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신용시장의 경색 및 주택경기의 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한지라 당시와 비슷하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연방준비위원회 의장.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그린스펀의 발언으로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직 미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인 버냉키조차도 스태그플레이션을 언급한 바 있다. 버냉키 의장은 지난 11월8일 미 상하 양원 합동경제위원회에서의 증언을 통하여 "유가의 급격한 상승은 물가상승에 대한 새로운 압력을 증가시키고 경제활동을 더욱더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직접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미국 경제가 당초 예상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미 연방준비위원회가 꾸준하게 금리를 인하하고, 유동성을 금융시장에 공급한데다 미국 행정부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금리상승, 신용시장의 경색으로 주택대출자들이 주택을 차압 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5년간 금리를 동결하는 조치를 취한 것 등이 작용하여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다소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린스펀의 발언이 전해진데다 특히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가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통에 스태그플레이션 논란이 크게 불거지게 되었다.

지난주 발표된 미국의 11월 생산자물가지수(PPI)는 3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내며 크게 뛰어 올랐고,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역시 0.8% 상승하면서 2년 만에 최고치를 나타내는 등 강력한 인플레이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기는 오히려 후퇴할 조짐이다.

■ 유가 급등으로 금리인하 정책 제동걸릴 수도

특히 유가 상승으로 촉발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이어질 경우, 최근 잇달아 단행되고 있는 미국의 금리인하 정책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미 연방준비위원회는 경기 둔화와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신용 시장의 경색을 우려하여 석 달 동안 연속적으로 금리를 내렸다. 하지만 이처럼 물가상승세가 높아진다면 심각한 고민거리가 된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강력하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금리를 인하하는 등 금융정책을 완화할 경우 자칫 인플레이션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인플레이션은 끝났다”는 인식으로 공격적인 금리인하 조치를 단행해왔는데, 정작 인플레이션 압력이 상존해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미 연방준비위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막막해졌다. 당장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미 연방준비위원회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인하여 더 이상 금리 인하정책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금융시장에서 미 달러화 금리의 인하가능성을 알아보는 지표인 연방금리 선물거래에서도 내년도에 미 연방준비위원회가 금리를 0.25% 포인트 인하할 가능성은 당초 90% 이상으로 산정되었으나 최근에는 74%로 확률이 낮아진 것으로 산정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의 금리인하 기대감도 점점 약해지고 있는 셈.

전문가들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감이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하고는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는 못하고 있다. 자칫 미 연방준비위원회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압력 중에서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하는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

경기와 인플레이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카드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은 비단 미국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시장의 하나인 시장인 미국이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의 이중고를 겪는다면 우리 경제에도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바람직한 최선의 시나리오는 국제 유가가 더 이상 상승하지 않고 하락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유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상당부분 감소할 터. 미 연방준비위원회로서도 재차 공격적인 금리인하 정책을 사용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신용시장도 안정되고, 덩달아 경기도 살아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순회 의장국인 알제리의 차킵 켈릴 석유장관이 내년 2월의 석유장관 회담에서 산유량을 늘릴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다소나마 희망적이다. 당분간은 석유 가격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형편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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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근 메버릭 코리아 대표 jayk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