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바쳤던 대우차 몰락… 새 직장서 자동차설계회사 창업 '아시아 최대' 우뚝야심작 말레이 프로톤사의 신차 보름만에 35,000대 팔려 '대박'도요타 계열사, 중국회사서도 수주… 인도·러시아도 진출예정

요즘 기업들의 가장 큰 고민은 단연코 ‘지속가능 경영’이다.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풍요를 어떻게 자손 만대까지 지속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모든 CEO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지속가능을 위해서는 성장해야 한다.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아 잘 키워야 한다. 지금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20여 년 전 시작한 조선, 반도체, 자동차 같은 산업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 후 우리를 먹여 살릴 아이템은 무엇일까? 각 기업들은 이를 찾기 위해 신수종 사업팀을 만들어 가동하는 등 분주하다.

이번 호에 소개할 V-ENS는 ‘한국판 신성장엔진’이란 생각이다. 우선 투자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 컴퓨터만 있으면 된다. 사람이 전부인 회사다. 한국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부가가치가 크고 시장도 크다. 이 회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직이다. V-ENS는 LG CNS가 2001년 만든 회사다. 따져보면 현재 이우종(52) 대표가 LG에 입사하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V-ENS는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큰 자동차설계전문 엔지니어링 회사다. 직원 대부분이 자동차설계 엔지니어다. 전체 인원은 550명 가량 되고 말레이시아, 중국에도 80여 명 정도 근무한다.

재무적 성과도 매우 좋다. 지난 3년간 매출이 463억 원, 478억 원, 565억 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41억 원, 49억 원, 67억 원으로 꾸준한 상승세다.

이우종 대표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엔지니어로 ‘골수 대우맨’ 출신이다. 서울고,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부터 대우 장학생이었으며, 당시 영재들이 모인 카이스트를 과수석으로 졸업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 후 대우에 입사해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고 대우 장학금으로 미시간대학에서 산업공학 박사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한 뒤에는 본인 희망에 따라 대우차로 배치됐다.

필자는 당시 동료로서 이 대표를 옆에서 몇 년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대우차의 살아 있는 신화였다. 과장으로 입사해 1년 만에 차장이 되었고, 부장 1년 만에 이사 부장, 또 이사 부장 2년 만에 이사를 건너뛰어 상무가 되었다. 상식을 뒤엎는 승진 퍼레이드였다. 하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뛰어난 리더십과 성과를 누구나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차 레간자의 프로그램 매니저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다양한 플랫폼과 자동차 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게다가 대우차와 쌍용차(당시 쌍용차는 대우와 한 울타리에 있었다)를 아울러 모든 차량의 설계 및 개발을 총괄하는 등 자동차 엔지니어링에 관한 한 지존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를 보면 사람에게는 역시 ‘팔자’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건만 대우차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는 대우차를 나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는데 바로 지금의 LG CNS다. 여기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가 V-ENS라는 회사를 만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저는 다시는 자동차설계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졌지요. 어느날 말레이시아 자동차 회사에서 프리젠테이션 요청을 받았어요. 한 시간 예정이었는데 질문에 응하다 보니 다섯 시간을 했고 그 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바로 자동차설계를 대행하는 2,300만 달러짜리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사 안에는 그 일을 수행할 조직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조선소도 없이 배를 수주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던 셈이죠.”

그의 흥미진진한 회고가 이어졌다. “그 회사의 CTO(최고기술책임자)는 물론이고 CEO가 홀딱 반했던 모양이에요. 저는 할 수 없이 설계조직을 만들었고 그것이 자라서 현재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우와 기아가 동시에 붕괴되어 설계전문 엔지니어들을 대거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형 자동차 회사가 일시에 무너진 것은 큰 불행이고 위기였지만 그 위기를 발판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자동차 전문 설계회사를 만든 것은 기회였지요.”

이 대표의 말처럼 V-ENS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대우와 기아가 비슷한 시기에 몰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자동차 시장이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로 옮겨가는 것도 이 회사에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V-ENS는 일본 도요타 계열사인 다이하츠(소형차 전문)의 2개 차종을 설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프로톤 사의 일도 맡고 있고 중국 자동차 회사와도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다. 인도 및 러시아의 대형 자동차 회사와도 곧 일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는 “남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안 간다”는 사업철학을 갖고 있다. 먹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곳이야말로 사업의 신천지라고 생각한다. LG CNS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의 생각에는 병원 관련 IT사업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들을 했다. “삼성이나 현대는 대형병원이 있습니다. LG그룹은 병원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겠습니까?”

그는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더 유리한 것 아닌가”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후 그는 세브란스 의료원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해 공부를 하면서 병원을 연구하고 관계자들과 교류한 끝에 세브란스의 대형 IT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다른 병원들도 덩달아 발주에 나서 사업이 번창했다.

방송통신 시장 진출 때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그 때도 직원들은 부정적이었다. “우리는 LG텔레콤과 데이콤이 있어 힘듭니다. 게다가 KT도 못하지요, SK도 못하지요. 한마디로 진입하기도 힘들고 진입해도 먹을 것이 적습니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케이블방송국이 전국에 200여 개나 되었고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있었다. 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기에 기술적 요구가 많아 시장은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C&M, 강남케이블 같은 곳을 뚫어 크게 히트를 쳤다. 남들이 장애로 생각하는 것을 오히려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의 위기관(觀)에 대해 물어봤다. “저는 위기를 즐기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혁신적 사고를 즐깁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항상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건설적인 독려도 합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부가가치 중심의 사고로 일하면 됩니다. 일이란 어려워 보여도 중요한 몇 개를 풀면 나머지는 관성이 붙어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위기나 장애 따위(?)는 가볍게 넘어서는 강인한 면모를 지닌 덕분인지 부하직원 중에는 그를 따르는 ‘추종세력’이 많다. 예전 직장 부하 출신들도 상당수 지금 회사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많은 후배들이 그를 쫓아온 것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V-ENS가 설계한 말레이시아 프로톤사의 사가(SAGA)란 신차가 지난 1월 출시됐다. 예상 판매대수는 연간 6만 대였는데 보름 만에 3만5,000여 대나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별다른 설비 투자도 없이 인력만으로 이 정도의 부가가치를 낸다는 것이 신기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엔지니어링 회사와 같이 진입장벽이 확실한 지식산업이야말로 미래의 성장엔진이란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안정적 수주를 보장하는 파트너십과 벤처기업처럼 유연한 제도운영을 통한 구성원의 동기자극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 진정한 지식산업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V-ENS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해본다.

■ 한근태 약력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환경재단 운영위원

환경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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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