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 외길 40여년… 사양산업 고전에도 포기 안해주경야독·현장주의·끊없는 변신이 성공 열쇠

갑을, 동국, 이화, 고합, 새한…. 한때 잘 나가던 섬유업체들이다. 지금은 사라졌다. 그만큼 섬유업계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한때 섬유도시로 이름을 날렸던 대구시가 어려움을 겪는 것도 섬유산업이 기울면서 비롯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회사도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윤성텍스타일도 그런 회사다.

이 회사는 1965년 설립된 미광염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6년 미광의 자회사로 설립돼 나일론 직물의 염색가공, 제직, 수출 전문업체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광다이텍과 주식회사 미광 등 관계사도 있다.

필자는 섬유과를 졸업했다. 많은 동창들이 섬유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어 섬유산업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이다.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송윤택(58) 윤성텍스타일 대표를 만났을 때 필자는 호기심이 일었다.

다른 섬유업체들은 망하거나 업종전환을 하는데 섬유업을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오랜 기간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를 섭외하는 것은 힘들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광이란 회사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1958년 대구에서 시작됐다.

윤 대표의 부친은 경북 칠곡에서 가내수공업 수준의 염색업을 했다. 기지를 끓는 물에 넣어 염색한 후 개천 주변에서 말린 다음 내다파는 일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형을 도와 이 일을 했다. 윤 대표는 가업을 지금 규모의 사업으로 키운 공을 형님에게 돌린다. 지금도 윤성텍스타일은 송 대표가 경영하고 미광은 형님이 경영하고 있다.

그는 주경야독의 표본이다.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든 격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일하면서 잔뼈가 굵었다. 부친이 고향 선산의 정미소를 인수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대구 계성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계속 일을 도왔다. 청구대(현 영남대) 섬유과에 진학한 것도 실무적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가 몸에 밴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현장을 잘 안다. 섬유업의 본질도 꿰뚫고 있다. 섬유업은 본질적으로 손이 많이 간다. 섬세하고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공정도 매우 복잡하다. 보통 30개 정도의 공정을 거친다. 어느 곳에서 어떤 문제점이 발생할지 모른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고 해결은 힘들다. 여간 까다로운 업이 아니다. 게다가 화재 위험도 높다. 남들이 다 가는 중국에 공장 이전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단순히 설비를 이전한다고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섬유회사는 중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이전하지 않았다. 도레이 같은 회사가 공장 부지를 공짜로 주고 일거리도 수십 년간 보장하겠다고 설득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기술만 빼앗기고 남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중국에 이전한 섬유회사 중 재미를 본 곳은 거의 없다.

그는 변신의 귀재다. 생산에서 연구로, 다시 영업으로 끊임없이 전공을 변화시키고 있다. 초년에는 생산에 전력투구를 했다. 36세부터는 영업에 집중하고 있다. 기술개발에는 늘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영업이 모든 것이라고 얘기한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영업은 제품에 대한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생산과 기술에 대한 전문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윤성텍스타일이 살아남은 것은 계속해서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일론 염색을 했다.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다 영역을 폴리에스터까지 확대했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의 일이다. 당시 경쟁자는 코오롱, 삼성물산, 선경 등 대기업이었다. 그들도 자체 염색시설을 갖고 있거나 관련사가 있었지만 염색기술에 관해서는 윤성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서 일등제품의 염색은 모두 이 회사에 맡겼다. 지금도 화학섬유 염색에 관해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82년부터는 기능성 소재의 후가공을 시작했다. 이 회사의 대표상품은 제2의 피부라 불리는 화인텍스다. 일명 ‘숨쉬는 섬유’라고도 불리는데 물은 안 들어가고 공기는 통한다. 다양한 야외복의 혁신적인 원단으로 방수, 열 차단은 물론 바람, 추위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수분침투, 증발성, 통풍 등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송 대표는 “품질은 고어텍스 못지않지만 가격은 5분의 1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 제대로 된 가격을 받겠습니다”라고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실패의 경험이 있고 위기도 있었다. “일본의 나까야마란 회사와 기술제휴를 해서 섬유관련 기계를 만드는 미광기계를 10여 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돈만 날리고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소사장으로 분사를 하면서 정리를 했습니다. 외환위기 때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중국에 많은 물건을 납품했는데 돈만 떼였습니다. 재고는 쌓이지요, 바이어는 오지 않지요, 돈은 돌지 않지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기술개발을 하고 구조조정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는 섬유업에 대한 사명감이 대단하다. 지금 가진 자산을 처분하면 나머지 삶을 편안히 살 수 있는데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는 뾰족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변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공장 대지만 팔아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사업이 힘들 때는 그런 유혹도 받습니다. 하지만 섬유업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저라도 이 사업에 ‘올인’해서 섬유업을 살리고 싶습니다. 섬유업은 사양산업이 아니라는 것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송 대표는 자신을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쪽은 보지 않고 섬유 쪽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는 고지식하다. 하지만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오늘의 생존과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식들도 모두 섬유업에 투입했다. 아들은 대를 이어 윤성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사돈은 일본 소니의 사장이다. 딸은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21세기 애국자는 바로 기업인들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하고 시장과 고용을 창출하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풍요를 누리는 것이다. 송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 한근태 약력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환경재단 운영위원

환경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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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