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대통령의 '백일'과 역사의 '백일'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들의 ‘첫 백일’과 역사에 새 전기가 시작된 후 ‘첫 백일’에는 차이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백일을 앞두고 5월 30일 신문사 편집국장, 방송사 보도국장과의 오찬에서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저도 인간이지 않느냐. 그것(신문보도)을 보고 늠름하면 가슴에 철판을 깐 것”이라며 “봐주십시오. 더 못견디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를 예고나 한듯 한국갤럽이 4월 29일 실시한 국민의식 2차조사에서 드러난 노 대통령의 2개월은 조금은 처참한 것이었다. 국민의 절반을 조금 넘긴 59.6%만이 국정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비슷한 기간, 김대중 전대통령은 98년 4월 70.7%, 김영삼 전대통령은 86.3%의 지지도를 각각 기록했다.

언론이나 여론 조사시간에서 대통령들의 ‘첫 백일’을 따지게 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1백일에 법적으로 뉴딜정책의 기틀을 마련 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한 데서 비롯했다. 그는 취임 1백일만에 의회를 설득시켜 예금보장, 농업보조, 테네시에 댐을 세워 공공사업에 실업인력을 동원하는 정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의 1백일은 ‘기적의 1백일’로 표현됐다. 케네디는 이런 ‘기적의 1백일’을 그의 취임연설에서 ‘1천일의 기적’으로 바꾸겠다’고 공언, 60년대를 헤쳐 나갈 젊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레이건의 1백일을 지켜본 언론들은 “통치의 기반을 1백일에 세웠다”고 평했다. 1981년 4월 국민 지지도는 73%였다. 미국의 대통령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아는 클린턴은 선거 운동 후, “나는 이미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나의 대통령 1백일은 현대 미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것이 될 것이다”고 자신했지만, 이뤄지지 못 했다. 그를 이은 부시는 “통치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평을 들었다. 1989년 그의 지지도는 71%였다.

공화당 아버지의 대통령직을 물러 받은 부시는 2001년 4월 68%의 지지 얻었다. 클린턴에 비해 차분하게 1백일을 맞았고 중국과 하이난도 정찰기 충돌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한 것이 지지도를 높였다. 그는 “’1백일’안에 무엇을 하려고 들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는 레이건 시대 국무장관 슐츠의 충고를 받아 들였다.

‘1백일’의 연원은 길다. 1815년 3월 20일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도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길에 나섰다. 그 후 ‘1백일’ 만인 6월 18일, 그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자 파리로 돌아 왔다. 그때 일부 파리 시민들은 “왕이 눈물을 흘리며 떠난 후, 파리는 1백일동안 슬픔에 잠겼다”며 왕정에의 향수를 표현했다.

역사속의 ‘1백일’에는 그렇듯 변명이 있고 음모가 있고 퇴장의 서글픔이 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키는 윌리엄 터부만 교수는 ‘스탈린의 항미(抗美) 정책’이란 저서를 낸 러시아통 역사학자. 그가 올 4월에 낸 ‘흐루시초프-20인간성과 그 시대’에는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후 1백일간에 벌어졌던 크레믈린 권력 투쟁의 현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음모의 역사요 잔인한 숙청사로 인식되고 있는 그 기간에 대해 터부만 교수는 스탈린 사후 ‘1백일’ 동안 ‘페레이스트로이카’가 잉태되었고 “저 벽(베를린 장벽)을 무너 뜨리자”는 ‘데탕트’가 싹 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흐루시초프와 맞섰던 내무성 장관 라브렐트니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는 2001년에 발표된 ‘베리야, 나의 아버지’에서 그 ‘1백일’의 역사성을 핵ㆍ미사일 물리학자의 어투로 동조하고 있다.

스탈린이 3월 5일 죽자 크레믈린의 권력 구조는 수상인 말렌코프, 정보와 경제를 다스리는 내무성 장관인 베리야, 당의 실력자 흐루시초프로 삼분되었다. 베리야가 ‘1백일’의 선두 주자였던 반면, 말렌코프는 흐루시초프와 연합해야만 수상의 자리를 지킬수 있었다.

’1백일’이 되어가는 과정에 흐루시초프는 베리야로부터 숱한 메모와 전화를 받았다. “내 의견을 심의하지 말고 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동독에 무력 개입 하기 보다 미국과 협의해 통일 시키자는 것도 있었다. 베리야는 “왜 매일 나한테 전화 (보고) 하지 않느냐”고 부하 다루듯 했다. 3월 26일 주코프 국방차관이 참석한 최고 간부 회의에서 베리야는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당신은 스탈린의 피가 굳어지지 않는 시간(‘1백일’)에 내각 수상을 임명하고 당 중앙위원회, 최고 간부 회의를 무시했다. 당신은 ‘인민의 적’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베리야는 주코프 등에 끌려 가 무장해제 되었고, 그 후 비밀 장소에 유폐되었다가 재판 장소인 벙커에서 총살형이 내려져 이마에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고는 아버지 베리야가 체포되던 날 집으로 들이닥친 인민들에 의해 납치되어 그 과정에 이미 죽었고 주코프도 죽기전에 체포에 나선 것을 부인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안드로포프가 제1선거 일 때 아버지 베리야가 적어 놓은 ‘페레이스트로이카’ 문서를 보여 주었다며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 이후의 데탕트와 개방의 주창자 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베리야는 오만과 실천력 부족, 역사를 단순하게 보아 권력을 놓쳤다”며 ‘1백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백일’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지 새삼 곱씹게 되는 시점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09-30 15:33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