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노무현과 클린턴


철도 파업 농성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추락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를 얼마나 높여줄까? 노 대통령은 첫 공권력 투입에 앞서 관리직 여성공무원을 상대로 한 특강(6월27일)에서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밀어달라”고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치상황을 개탄했지만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좀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당은 국회를 그냥 놀리고 여당은 신ㆍ구주류끼리 싸움질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정치 현실은 마지막 몸부림이자 혼돈 상태다.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새로운 질서가 된다”고. 그렇다면 ‘새로운 질서’를 위해 마냥 혼돈 상태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그 답을 좀 엉뚱하지만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8년 집권에서 찾아보자. 클린턴 전 대통령은 6월19일 시카고에서 열린 흑인 연대 모임인 레인보우 회의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판했다. “테러는 우리를 패배시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와 우리 후세의 미래를 담보로 테러 위협과 타협할 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킨 것을 에둘러 지적한 것이다. 재정흑자를 감세정책으로 소멸시킨 것도 지적의 대상이 됐다.

그가 이토록 자신있게 부시를 비판하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부인 힐러리 상원의원이 낸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의 국내정치 및 언론 분야 수석보좌관이었던 시드니 브루맨탈의 회고록 ‘클린턴의 전쟁’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서 베스트셀러 15위안에 올라있는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클린턴의 전쟁’에 따르면 클린턴은 집권 8년 동안 루즈벨트, 케네디, 존슨의 뒤를 이어 진보적인 민주당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클린턴에게 닥친 것은 화이트워터 땅투기사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등 거대한 ‘우파 음모세력’과의 전쟁이었다.

브루멘탈은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속에서도 백악관 보좌관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기소를 당하지 않았고 각료 중에서 겨우 두명이 부정혐의를 받았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스타 특별검사나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까발린 각종 스캔들은 쓸데없는 공격용으로 몰아 붙였다.

닉슨 전 대통령 시절 27명의 고위급 관료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레이건 때는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32명이 범죄혐의로 기소된 것에 비하면 그의 스캔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것은 98년 1월 17일부터 1주일 간이었다. 신생 인터넷 언론 ‘드럿지 리포트’는 “23세의 백악관 여성 인턴이 대통령과 성적관계를 가졌다”는 뉴스위크 기사를 보도되기도 전에 ‘특종’이라며 폭로했다. 그 인턴은 르윈스키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참모진과의 숙의 끝에 “나는 이 여인과 절대로 부적절한(improper)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발표했고 방송과의 회견에서도 “‘부적절한 관계’는 ‘성적 관계’가 없고, 부적절한 성적관계 등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정확히 말하면 성적인 관계가 아니다는 뜻”이라고 강변했다. 그가 예일대 법대 출신 변호사답게 말을 돌린 것으로 해석됐지만 사실 그의 언어 선택은 미 대통령직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재선에 성공한 클린턴은 97년 1월 29일 상ㆍ하원 양원 합동회의에서 국정연설을 했다. “우리는 ‘정부가 국민의 적’이라는 주장과 ‘무어라 해도 정부가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놓고 논란을 벌여왔다. 나는 ‘제3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우리는 (케네디 이후) 35년간 작은 정부를 유지하며 보다 진보적인 정부를 지향했다. 우리는 지금 작은 정부지만 강한 국가를 갖고 있다”고.

정작 본인의 스캔들에 대한 해명은 없었다. 지난 4년간 ‘제3의 길’을 택해 ‘작은 정부 강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일자리 창출과 의료보험 혜택, 학교에 투자 확대와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부자들에 대한 세금 중과, 자유무역의 세계화 등을 역설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혼돈’에만 맡기지 않는 것이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적절한 일’이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 전 대통령에 대한 평전 ‘아직 끝나지 않은 생애’를 쓴 역사학자 로버트 다렉 컬럼비아대 교수는 브루맨탈의 ‘클린턴의 전쟁’에 대해 “90년대 미국의 정치가 대통령 개인의 취약성 때문에 비생산적이었음을 (이 책은)잘 보여준다.

클린턴 시대의 정치적 신랄함, 냉혹성을 다시 보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또 스캔들로 인?클린턴 시대의 시간적 방황은 아무리 브루맨탈이 방어에 나서도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윌터 휘트만의 시,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백악관에 있다. 국민이 그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는 문구는 ‘혼돈’에서 빠져 나와야 할 노 대통령이 음미할 시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09-30 15:35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