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宋斗律교수와 나


송두율 교수의 2일 있은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을 읽으며, 그의 말들과 표정을 보며, 나는 그가 ‘서글픈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나는 이 칼럼을 쓰는 박용배(언론인)이며 전 한국일보 통일문제연구소소장(1989~97년)이다.

송 교수와 나와의 인연은 ‘어설픈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나는 1991년 5월 24일자 노동신문 1면에 난 입을 조금 헤벌린 김일성 주석의 옆에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의 사진을 보고 놀랐다. 사진의 크기는 가로 15㎝ 세로 18.6㎝였다. 89년 3월 28일자 노동신문에 난 김일성과 문익환 목사의 것은 14.8㎝, 17.5㎝였다. 나는 이 놀라움을 그때 내가 한국일보에 쓰고 있던 ‘남과 북’이란 고정 칼럼에 ‘주체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썼다.

“그는 북에서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고 외쳐대는 ‘주체’를 소련, 중국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과 동일시 하고 있다. 결정론을 펴지 않았지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그리고 주체-소련ㆍ중국ㆍ북한의 사회주의 비교’라는 이책의 본론에서 북에 대해 편애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하이테크 시대에 맞게 개조한 것, 중국 개혁은 모택동 사상의 계승과 혁신이라고 본다. 그러나 북의 ‘주체철학’은 ‘사회주의는 낙후한가, 그렇지 않으면 현대적인가’하는 가치체계 보다는 ‘예속이냐 그렇지 않으면 자주냐’에 둔 사회주의 철학이라는 식으로 편들고 있다”고 썼다.

그가 체북 할 당시에는 남ㆍ북한 유엔동시가입, ‘조국통일 방도의 대원칙에 대한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의 토론회’가 평양에서 열리고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할 태세였다. 그는 서울에서 8월에 열리는 ‘한민족 철학자 대회’에 참가할 뜻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느쪽 학자로든 참가해 그가 눈으로 본 주체철학의 실상을 털어 놓았으면 한다”고 끝을 맺었다.

이 칼럼에 대해 그때 한림대 교수 였으며 철학연구회장인 송상용 교수가 한국일보 6월 27일자에 “송두율 박사는 ‘주체철학자’인가”라는 반박문을 보내왔고, 이 글이 실렸다. 송상용 교수는 내가 쓴 그(송두율 교수)의 북에 대한 편애적인 자세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고 썼다.

송상용 교수는 이 글에서 1989년 철학연구회 주관으로 주체철학 모임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지금 주체사상이 전부이다시피 한 북한과 통일 협상을 벌이고 있다. 주체사상의 연구와 주체철학자들과의 대화는 절대 필요하다. 우리 가운데 주체사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어떠랴. 주사파를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강점 아닌가! 우리 정부가 송두율 박사를 무조건 받아주기 바란다”고 결론 지었다. 송두율 교수가 혹시 내 칼럼 때문에 못 올까 걱정해서 였을 것이다. 내가 마녀 사냥꾼(witch hunter)이 아닐까 우려해서 였을 것이다.

이 글이 실렸을 때 나는 통일원 연수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거쳐 백두산정에 있었다. 돌아오니 독일 다름슈타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구승회씨(현 동국대 교수)가 긴 팩스의 반박문을 보내왔다. 제목은 ‘박 소장의 尺’이었다.

“신문사의 통일문제연구소장이라는 자리가 노동신문에 난 사진을 문익환 목사 사진보다 0.2㎝, 1.1㎝ 크다는 것을 재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그건 朴 소장의 자(尺)가 관념의 자를 실제의 자로 착각해 저지르는 것이다. 주체철학이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철학은 항상 황혼에 나래를 편다’는 헤겔의 말을 철두철미 옳았던 것으로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늦은 걸음걸이로 과학의 긴 낮시간이 지난 후에야 등장 하기 때문이다.” 송두율 교수는 평양을 다녀온 후 한겨레신문에 평양방문기를 실었다. 그때는 나를 직접 반박 안 했기에 나는 침묵 했다.

해가 바뀌어 92년 초에 그는 국내에 낸 네 번째의 책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 ‘에필로그-서글픈 이야기’에서 나를 직접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는 나의 ‘주체철학자’의 글은 “남과 북 사이를 남쪽에서 북쪽이냐를 미분하며 적분으로 이룰 통일을 방해하는 ‘서글픈 이야기’꾼의 것이다”고 썼다.

“나를 놀라게 하고 또 슬프게 하는 것은 설사 ‘제도언론’이라 할지라도 소위 이의 논설위원까지 지냈다는 중견 언론인의 세계인식의 수준과 양식이었다. 그가 결론적으로 지적하고있는 ‘어느 쪽이냐’는 표현은 ‘남과 북’이라는 칼럼 제목과 걸맞지 않기 때문에 이는 ‘남쪽이냐 북이냐’로 고쳐져야 한다”고 썼다.

나는 93년 6월 나의 첫 칼럼집 ‘남과 북-수령, 지도자 그리고 북한’에서 ‘어설픈 이야기’로 그의 ‘서글픈 이야기’를 반박했다. “2년 여동안 북의 수령과 지도자, 주체철학 등을 미분한 내책을 한 권 보내겠다. 송 박사의 ‘전환기의…’를 읽어보면 서글픈 이야기꾼인 필자에게는 송 박사가 너무나 너무나 북의 수령과 지도자와 그들 부자에게 되지도 않은 이론체계를 제공해 주는 북의 지식인에 너무 편중되고 편애하고 동정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남쪽에 대한 송 박사의 냉혹한 질시에 비해 그렇다”고 썼다.

그는 2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다 인정합니다. 예컨대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 보아준 많은 분들, 민주화 운동에 애쓰신 분들, 그리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사죄 하고자 합니다.”

그의 ‘그 동안 치우친 점’을 지적한 나는 그의 서글픈 목소리를 용서해 줄 수가 없다. 그의 이야기가 아직도 어설프게 들리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10-10 10:05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