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내가 만난 宋斗律 교수


검찰은 10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돌풍 속에 다섯번째로 송두율 교수를 소환 조사 했다. 송 교수가 95년 출간한 ‘역사는 끝났는가’,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등 저서에 표현된 그의 주장과 사상체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위해서 였다. 검찰은 이번 주 중 한 두차례 더 그의 전향 의사 등을 조사한 후 기소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보는 지난 6일 하오 9시께까지 4,450명의 네티즌들에게 그의 처리를 물었다. 80.3%(3,572명)가 추방을 포함, 어떤 식으로든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용을 베풀어야”는 겨우 18.2%(870명)였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관용에 기울어져 있다. 그에 대한 생각이 시민과 학자 사이에 큰 틈새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회 급진세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유지해온 박홍 서강대 이사장은 동 대학에서 10일 있은 ‘2003 한국 철학 학술대회’ 만찬장에서 그에게 관용을 베풀기를 바랬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체험하고 이를 극복하려 몸부림치는 송두율 교수의 처지를 사법 당국도 잘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 주판알을 튕기듯이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분단의 모순을 온 몸으로 겪어온 송 교수에게 과거와 미래와의 화해를 강조하고 싶다”고 만찬사에서 밝혔다.

박 이사장은 송 교수와 만찬이 끝날 즈음 ‘사랑해 당신을’이란 가요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송 교수는 만찬 막바지에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어가면서까지 바다 요정 사이렌의 유혹을 이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10년이 걸렸다. 지금 겪는 충격과 고민이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를 독일에서 1977년 가을에 만났고 이번 초청에 간여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 박호성 교수(서강대 정외과)는 “그의 추방만은 민족적 자존심을 걸고라도 결단코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나의 유학생 초년생 시절, 베를린에서 동포들이 모여 소박하게 8ㆍ15 경축식을 치르며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나는 우연히 송두율 교수의 옆에 서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동안 그는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게 아닌가. 과격한 반체제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투사가 이런 데서 어떻게 눈물을 보일 수 있는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박 교수는 그의 이념적 위상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중도파 정도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에 앞서 1968년부터 독일에서 송 교수와 알게 된 서울대 철학과 4년 선배인 이삼열 교수(숭실대 철학과). 그는 ‘20대 보수와 50대 진보가 만나는 공간’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출범한 ‘업 코리아 닷넷’과 프랑스에 있으면서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추방 불가론을 폈다.

“한 명의 학자를 길러내는 일은 어렵다. 긴 안목을 가지고 처리해야 한다. 송두율 교수를 추방하는 것은 해외에서 북한에 왔다갔다하는 재외동포 60만 명을 적으로 보는 행위다. 지금의 찬반논쟁은 한국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송두율 교수도 좀더 솔직한 양심고백을 하고 남한사회에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유신 직후인 74년 3월 1일 ‘3ㆍ1운동 55주년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선언서’를 독일의 본 대사관 앞에서 송 교수와 함께 “10월 유신은 민주사회의 반역이다”라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때 송교수가 민주사회 건설협의회 회장, 이 교수는 부회장이었다.

이 교수는 “그가 80년대 입북한 사실은 알았지만 73년에 입북한 사실은 몰랐다. 같이 활동하면서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북쪽을 드나드는지 몰랐다.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대해 호감(sympathy)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부분은 사상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이었다.”

이 교수는 5ㆍ18 이후 그와 갈라서 82년에 귀국했다. “5ㆍ18 이후 남북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남한의 민주주의를 해결 못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이창균, 오길남 등은 북쪽으로 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국내로 들어오는 것이 백기를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북쪽 관계에 대해서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야 남한 내 민주세력이 산다는 입장이었다. 이념, 전략상의 차이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는 송 교수는 이미 평양에 발을 디딘 후였고 그 후 이 교수에겐 정치국 후보 23위로까지 발전한 송 교수의 편향은 이념문제보다 양심의 문제가 되어갔다.

독일에서 만난 박, 이 교수의 회고와는 달리 중앙瞿?권영빈 편집인의 송 교수에 대한 만남은 조금 다르다. 권 편집인은 1996년 남북학자가 참여한 통일포럼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경계인 송두율의 선택’이란 칼럼에서 “그의 내재적 접근론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이념을 평가의 중심축에 놓고 그것이 현재 어떤 성과로 나타나고 있나를 평가 비판하는 방법이다.” “내재적 접근이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비판을 막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내재적이란 외재적의 반대말이 아니라 선험적인 것, 예컨대 반공 이데올로기를 뜻한다고 했다.

주체사상의 관점에서 북한을 비판하고 자유 민주주의 관점에서 남한을 분석하자는 게 그의 내재적 접근론이다” “이런 철학자가 간첩이 되어 가고있다. 철학자 송두율은 더 이상 주저 할 것이 없다. 작가 황석영이 충고했듯 사즉생의 각오로 진실을 털어 놓고 새로운 삶을 선택 하는 것이다”고 권고했다.

송 교수가 통일문제에 있어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따지는 미분(微分) 언론인이 ‘서글픈 이야기꾼’인 필자는 송 교수를 책을 통해 알아왔다. 10일 저녁에 광화문 교보문고 신간코너에 송 교수의 책은 수북이 쌓여 있지만 몇 사람만 뒤적일 뿐이었다. 그가 ‘경계인’에서 ‘회색인’으로 추락해서 일까. 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일까’, ‘평양의 박쥐’일까 자문해 보았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3-10-15 11:25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