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묻지마 채권의 자업자득


가진 재산이라고는 예금 29만원이 전부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차남 재용씨 등을 통해 1,000억원대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는 의혹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분명 비자금을 은닉해 놓았을 것”이라고 강한 의혹을 가져왔던 터이지만, 막상 사실로 확인되고 보니 국민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건의 본질을 접어 두고,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전씨가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무기명 채권이다. 전씨측은 사채업자 30여명을 동원해 현금으로 증권금융채권 등 무기명 채권을 집중 매입한 뒤 다시 내다파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세탁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명 채권이 발행된 것은 국민의 정부 초기인 1998년, 나라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통치로 쑥대밭이 된 무렵이었다. 부유층이 보유하고 있던 ‘검은 돈’을 양성화해 시중 자금난을 덜겠다는 취지였다. 증권금융채권, 고용안정채권,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등 3종류로 액면가만 3조8,000억원 어치.

개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10만원 짜리 자기앞수표에도 뒷면에 이서를 해야 하는 마당에, ‘무기명 채권’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 채권들은 사고 팔 때 본인의 신분을 전혀 밝힐 필요가 없었다. 부유층의 검은 돈, 즉 지하 자금에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면죄부’를 준 셈이다. ‘묻지마 채권’이라는 냉소 섞인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업자득이다. 지금껏 검은 뭉칫돈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무기명 채권의 이름이 거론됐다. 세무 당국이나 정부로부터 감시 당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는 부자들로서는 ‘감시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게 해 준 정부에게 아마도 꾸벅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테다. 아마도 전씨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

10월말 만기를 맞은 증권금융채권의 경우, 만기가 지나도록 발행 채권의 60% 가량은 아직 상환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 만기 이후에는 이자가 단 한 푼도 붙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무기명 채권이 얼마나 불법적인 용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경제가 바닥을 헤매면서 ‘제2의 IMF 위기’라는 우려가 높다. 대통령 재신임과 함께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부로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경제를 살리는 것은 정부의 책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더 이상 ‘무기명 채권’ 같은 편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경제를 살리는 데도 정도(正道)가 있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 뭐. 방법은 묻지 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1-04 13:42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