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대선자금 콤플렉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씌워진 태생적 굴레인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거꾸로 우리 사회의 문명화를 앞당긴 아이러니를 저서 ‘토템과 금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먼 옛날 어떤 원시부족의 족장이 여자들을 독차지하려고 자식들을 겁주고 때리고, 또 내쫓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학대를 계속 참아내기엔 본능이 너무 뜨거웠다. 자식들이 서로 짜고 아버지를 죽였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한명의 경쟁자를 물리친 것에 불과했다.

뒤이어 시작된 형제간의 싸움은 끝날 줄 몰랐고, 어느 순간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식들은 죽은 아버지를 신성화(토템)한 뒤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 같은 씨족안의 여인을 넘보지 않고 옆 씨족의 여인과 혼인을 맺기로 했고, 그 결과 교류 및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경쟁상대로 보는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근친상간적 가족 단위의 부족이 도덕과 법의 지배를 받는 문명사회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일방적이지만, 문명의 계통발생적 측면에서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이론이다.

나라를 온통 들쑤셔놓은 SK 비자금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대선자금이 이 시대의 태생적 콤플렉스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공포의 대상, 혹은 그런 공포 때문에 우리 내부에 켜켜이 쌓여온 스트레스가 오늘날의 콤플렉스를 만들어냈음 직하다.

언제부턴가 권력을 창출한 대선자금은 어떤 경우든 피해가야 하는 하나의 성역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시중에는 수백억원대 자금을 풀었느니, 모두 1,000억원대 자금을 썼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실제 선관위 신고액은 몇분의 1에 불과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안 들키면 무죄였다.

그런 대선자금도 이제 하나 둘씩 까발겨지고, 우리는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받은 돈 11억원이 기폭제가 돼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 100억원대 불법자금이 불거지더니, 급기야는 정치권 전체가 대선자금을 놓고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 양상이다. 어느쪽이든 완전히 항복해야 끝날 태세다.

대선 패배후 정계를 은퇴한 한나라당 이회창 전 후보가 일찌감치 두손을 들었다. 그는 “대선자금 문제는 후보였던 자신의 책임이라며 감옥에 가더라도 자신이 가야 한다”고 ‘후보 책임론’을 제기했다. 지도자로서 무한 책임을 진다는 그의 태도는 반가우나 이미 불거진 SK 비자금의 사용처나 모금 경위 및 사전 인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가 ‘교묘한 말장난’으로 끝나지나 않을지 의심쩍다.

모든 관련 장부가 한나라당에 있는 만큼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보다 명확하게 짚고 넘어갔어야 한다고 본다.

이회창 후보의 사과로 야당 공격의 표적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엊그제 철저한 검찰 수사로 대선자금의 전모를 밝히자는 원칙론을 제시했다. 한나라당과 달리 들킨 게 없다고 해서 ‘사과나 언급할 게 없다’고 할 처지는 아닌 듯, 우선 검찰수사에 협력하고 지켜본 뒤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 진영에서 대선자금을 주물렀던 열린우리당 이상수 의원이 해명할 때마다 숫자가 틀리고 계속 말이 바뀌는 상황에서 검찰수사 뒤로 몸을 숨기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대선자금 콤플렉스를 떨쳐 내지 못한 탓일 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가 어떤 이유에서든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계집아이 같은 남자(sissy)가 된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할 확률도 높다. 그래서 그는 오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당당한 ‘남자의 길’을 제시한다.

이미 터져버린 대선자금을 명쾌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sissy’가 될 수밖에 없다. 해법은 하나 뿐이다. 모든 당사자가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도록 ‘남자의 길’ 을 가는 것이다. 이 후보가 ‘남자의 길’을 택하겠다면 “감옥에 가더라도 내가 가겠다”며 말로 끝내지 말고 진짜 책임을 지는 일이다.

노 대통령은 검찰수사를 뒤에서 지켜볼 게 아니라 앞장 서 대선자금 계좌와 관련 장부를 낱낱이 공개하고, 아는 것 모두를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밝혀야 한다. 그리고 후보로서 그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명확히 해야 한다. 최도술 전 비서관이 받은 SK 돈 11억원에도 “눈앞이 깜깜해 재신임을 묻겠다”던 노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책임을 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회창 후보에 맞서 ‘낡은 정치’를 타파하고 새 정치를 하겠다고 공약한 ‘노짱’이었다. 이 후보도‘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겠다’ 고 했는데, ‘나는 살겠다’고 한다면 새 정치는커녕 낡은 정치 타파도 못할 것이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1-04 13:47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