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부자만 정치 할 수 있는 나라



# 대화1

“정치자금이나 뇌물로 ‘억 억’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줬다 하면 수십억이고 백억대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지.”

“월급쟁이 한평생 꿈이, 요즘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10억 만들기’인데, 그걸 한번에 턱하니 넘겨주고 당연한 듯이 받는 세상이니.”

“넘겨주는 세상이 뭔가? 맡겨놓은 것처럼 달라는 세상인데…”

“그래도 뒤는 구린 모양이지, 주고받는 방법이 교묘해지는 걸 보면. 그것도 진화하나 봐. YS시절에 전설처럼 떠돌던 모 회장의 이야기는 아예 낭만적이지. 현금이 든 가방을 자리 옆에다 두고는, 손님이 나갈 때 ‘아니, 가방을 잊고 가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들고 나가게 했다더군.”

“가방엔 돈이 얼마쯤 들어갈까?”

“케이크상자에는 수천만원, 007가방은 2억원, 골프백엔 최고 3억까지 들어간다더군. 너무 많이 넣으면 툭 불거지니까 1억원 정도가 딱이라던데.”

“그러던 게 언제부터 ‘차떼기’가 됐지. 가방에서 사과상자로, 이제는 차떼기로….”

“한때는 돈 상자를 승용차로 옮겨싣는 게 유행이었대지. 근데 그 수법이 공개되고 나니 남의 눈도 무섭고…, 또 승용차엔 얼마 안들어가잖아. 기껏해야 수십억?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현대로부터 200억원을 받는 과정을 놓고 현장검증을 했는데, 고급 승용차에도 40억~50억밖에 안들어갔잖아. 그걸 싣고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느냐 없느냐 다퉜으니 해외토픽감이지.”

“LG는 머리가 좋은 거야. 150억원이 든 냉동탑 차량을 만남의 광장에서 넘겨주었으니. 돈박스를 내릴 때 사람들은 무슨 제품을 내리는가보다 했겠지.”

“그 사건이후 홈쇼핑 방송을 패러디한 돈가방 유머가 유행하더군. 돈 150억을 넣을 수 있는 돈가방 3종 세트를 3만9,900원에 파는데, 경품추첨을 통해 그것을 한번에 운반할 수 있는 2톤짜리 냉동탑 차량을 그냥 드린다고….”


# 2

“박지원씨가 징역 12년을 받았대”

“뇌물 150억원은 건국 이래 최고라니까.”

“그걸 보면 우리 선거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 수 있어. 지난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뒤집으려고 욕심을 냈을 거야. 노무현 대통령도 그때 원없이 돈을 써봤대잖아. 150억이래야 1억짜리 CD로 150장에 불과하니까, 얼마 안되네 생각했겠지.”

“그래도 돈세탁은 장난이 아니었을텐데.”

“벤처바람이 불 때 사채시장에 워낙 소문들이 많아 묻혔겠지. 그땐 사채시장에 수백억이 우습게 돌아다녔잖아. 1억원짜리 CD 150장 처리는 우스웠겠지.”

“그나마 앞으로 시민단체가 뇌물이나 정치자금으로 돈을 건넨 기업에 대해서는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니까, 기대를 해야지.”

“대선자금 수사도 주고받은 사람의 사법처리로만 끝나지 않겠군.”

“손해배상소송이 쏟아지겠지. 기업으로서는 대선자금 수사의 후폭풍이 더 무서울걸.”


# 3

“내년 총선에 출마할 친구가 있는데, 돈 때문에 죽으려고 하더군. 행사할 때마다 할머니들이 수십명씩 몰려오니 문전박대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이 없으면 행사가 안되잖아. 젊은 사람들이 그런 행사에 누가 따라다녀?”

“그러니까, 아직 돈 안드는 선거는 이상이고, 현실은 표를 지닌 할머니들이야.”

“대선후보들이야 오죽했겠어?”

“당연하지. 대선 때 따라다니는 기자들만 해도 수십명이잖아. 지방유세를 가서 고급호텔에서 묵는다고 쳐, 기자들 숙박비는 누가 낼까?”

“후보들이 내야겠지.”

“그건 ‘폭포수에 떨어지는 물방울’이래.”

“그래도 그 돈이 어디서 나왔겠어. 거의 마피아식으로 기업에 손을 벌렸을걸. 누가 돈을 좀 더 받았나 하는 차이는 있겠지. 한나라당에 공식 후원금으로 20억~30억원을 주고도 100억원대의 불법자금을 또 넘겼는데, 노 후보 쪽에 안줬다가 나중에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노 후보측도 특별당비로 수천만원씩 냈다던데, 어디서 나왔겠어.”


# 4

“이젠 진짜 클린코리아가 되겠지. 검찰이 저렇게 대선자금을 까발기니….”

“두고봐야지. 돈 안드는 정치가 쉬운가?”

“불법 정치자금을 못 받게 되면 돈 있는 사람들만 정치를 하겠지. 그것도 문제야. 이탈리아를 봐, 마니폴리테(깨끗한 손)란 검은 돈 추방이후 베를루스코니라는 재벌 회장이 총리가 됐어. 92년 대선때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돈에다 권력까지 가지려고 한다고 비난했는데, 우리 손으로 부자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꼴이 될지 몰라.”

“어차피 정치 행위엔 돈이 들기 마련이야. 민주주의를 잘 한다는 미국도 정치未鳧?엄청 들잖아. 돈 안드는 정치란,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면 그저 구호에 그칠 걸. 아예 기업들이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기업이 ‘이중부담 가능성이 높다’며 그걸 반대해. 시민단체도 그렇고.”

“그러면 방법이 없잖아.”

“정치개혁을 해야지”

“말처럼 쉽다면 왜 아직 못했을까?”

“국민의 의식수준이 가장 문제야. 선거 때만 되면 뭔가 기대하니까. 그러고선 나중에 다들 죽일 놈이라고 욕하니 쯧쯧…. 아직 우린 멀었어.”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3-12-17 10:25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