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에 돌아온 국군포로 전용일

[People]사선을 넘어..반세기 만의 귀환
50년만에 돌아온 국군포로 전용일

“네가 끝분이야. 끝분아, 오빠를 용서해라. 오빠 구실 못했다.”

12월26일 오후 2시30분 서울 용산구 국방회관 1층 연회실은 반세기 만에 이뤄진 한 가족상봉으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목숨을 건 북한을 탈출을 시작으로 기나긴 역사의 길을 되짚어 우여곡절 끝에 50년 만에 남한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전용일(72)씨. 검정 모자와 반코트 차림의 전씨 표정엔 험난했던 우리 현대사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여동생 분이(57)씨 등 가족과 서로 부둥켜안은 채 상봉의 기쁨에 흠뻑 젖었다.

이것이 꿈인가 아니면 생시인가. 전씨는 동생이 “TV에서 나온 얼굴보다 좋다. 얼굴이 건강하게 보인다”고 하자 “이제 마음 푹 놓아라. 오빠가 업어주고 안아줄게. 이 오빠는 나약한 놈이 아니야”라며 흐느꼈다. 지나간 반 평생의 시간들이 너무도 가혹하고 절실했기에 그는 한 동안 오열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소집명령을 받고 19세의 나이로 입대했던 청년 전용일은 1953년 휴전을 한달 정도 앞둔 시점에 강원 김화군 전투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붙잡히면서 그의 인생은 격랑의 파도에 휘말렸다. 그리고 3일 후 그는 국군에 의해 전사자로 처리됐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낸 전시 상황과 정부 당국의 정보 수집 능력 부족이란 현실적 이유가 없진 않았으나 엄연하게 살아있는 전씨에겐 '사망통고'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목숨만은 건지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북녘 땅에서의 고난과 탈북(脫北) 사연 등은 우리 현대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5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해 “도와달라”는 그의 요청을 받고도 처음에는 “신원확인이 안 된다”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정부 역시 뒤늦게 그의 귀환 노력에 나섰고 자칫 정부의 무관심 속에 북송될 뻔 했던 그는 다소 수척한 모습이지만 안전하게 귀환했다.

일흔 두살 국군포로의 귀환 과정은 '국가의 명령에 따르다 고초를 겪은 시민에게 그 국가는 예의를 갖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의 귀환은 또 한동안 잊어졌던 한국전쟁 포로의 귀환 문제를 곱씹게 한다.

지금 국립 현충원의 충혼탑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한국전쟁 전몰 장병의 이름이 수없이 새겨져 있지만 그들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전씨의 귀환을 보면서 국군포로의 생사 파악은 우리의 최대 과제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4-01-02 17:00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