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정치꾼이 아니라 정치가가 되기를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12ㆍ19 대선이후 1년여만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나라 전체가 권력이동의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숨 돌릴 틈이 없었는데, 또 한차례 태풍을 예고하는 먹장 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4월15일로 예정된 제17대 총선은 노무현 정부의 앞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전망이다.그가 대선 승리 직후 “다음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지 못하면 ‘반(半)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내비친 것도 그 때문이다.

취임 첫해 여소야대의 국회에 떠밀려온 대통령으로서는 4ㆍ15 총선에서 반드시 이겨 다수당 자리를 차지해야 앞으로 4년 가까이 남은 임기동안 노무현식 국정운영을 시도해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 뿐인 대통령’으로 전락할 판이다. 그냥 흘려 들을 만한 대통령의 말 한마디까지도 총선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편이 더욱 정확한 속내를 가려내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엊그제 총선에 나서는 청와대 출신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차기 총선을 한나라당 대 노 대통령(열린우리당) 양당구도로 갈 것”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청와대는 아주 사적인 만남에서 한 사적인 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발언을 언론에 그대로 전해준 의도는 아주 ‘정치적’이다. 고단수의 정치게임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역대 대통령들의 총선 개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최고통치권자의 품위와 선거중립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대놓고 총선에 개입하는 발언은 자제했을지언정 언론과 무대 뒤에서는 그야말로 ‘할 짓 못할 짓’ 다 했다. 노 대통령의 직설적인 총선 화법에서 오히려 달라진 권력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금만 더 달라졌으면 하는 것이다. 사적인 만남 운운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힐러리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빌(클린턴)은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유세 지원에 나서라는 권유를 받았다. 나는 빌이 국민 눈에 ‘정치꾼’이 아니라 ‘정치가’로 비쳐지기를 원한다면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은 결국 선거 유세의 의혹을 이기지 못하고 민주당 선거운동 사령탑이 되었다.”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이 소속 정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총대를 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노 대통령도 충북언론인 모임에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당의 행사에 참석하고 그 당 소속 의원의 후원회에 참석해 분위기를 북돋우고…”라며 미국과 같은 당정분리 원칙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전에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신당에 불관여원칙을 지켜달라고 하자) “그동안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할 것”(2003년 9월4일 국회의장 및 4당 대표 회동) “나는 여당의 영수가 아니라 행정부의 수반이며 민주당 한나라당 대표끼리 만나 회담하는 것이 여야 영수회담”(2003년 7월22일 대선자금 관련 기자회견)이라고 피해갔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그리 늦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한국식 당정분리란 이름 뒤에 숨지 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총재든 명예총재든 직함을 갖고 당 행사에 나서야 한다. 또 노사모가 주최한 ‘리멤버 1219’ 행사에서 “시민혁명”을 외치고 앞으로 ‘개혁 코드 인사’들을 향해 총선 징발령을 내리는 것도 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치임을 밝혀야 한다.

그게 아직 우리 정치풍토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당당하지 못한 일이다. 노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이 낡은 정치, 고질병과 같은 정치 풍토를 고치는 것이라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클린턴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에게 상원 8석, 하원 54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앞으로 2년 동안 상하원이 모두 공화당의 지배아래 놓일 것을 생각하니 맥이 빠졌다”는 게 힐러리의 토로다.

노 대통령도 벌써부터 그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정정당당한 것보다는 국민의 관심을 끌 이벤트화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총선 출마 공직사퇴 시한인 2월15일 이전에 청와대발 열린우리당행 열차엔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보이고, 막차엔 노 대통령이 승차하고, 여의도에 대통령 입당식 축가가 울려퍼지는 식으로….

순서가 틀렸다. 낡은 정치를 끝내고 새 시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게 역사적 사명이라고 여긴다면 총선에서 참패를 하더라도 그 순서를 바꿔야 한다.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뒤 클린턴처럼 총선 승리를 위해 총대를 매야 한다. 그게 노 대통령이 지난 1년간 부르짖은 새 정치의 시작이고, ‘정치꾼’이 아니라 ‘정치가’가 되는 길이다.

입력시간 : 2004-01-0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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