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클린턴 재선에서 배운다


미국의 한 대학에 연구차 가 있는 S대 모교수가 새해 인사 e멜을 보내왔다. 통상적인 신년 인사로 시작했으나 곧바로 국내 정치로 건너뛰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한해에 쏟아낸 말, 특히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진퇴를 단정적으로 밝힌 부분에 우려를 나타냈다.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일세, 어떻게 한 나라의 최고책임자가 (불법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1이 넘으면 그만두겠다고 하고, 못해먹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탄핵 대상에 오른 대통령이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뱉어서는 안되는…” 머나먼 타향에서 뒤늦게 고국 소식을 들었을 그도 가장 당혹스러웠던 게 소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이었나 보다.

“혼란스러웠던 취임 첫해는 여러모로 클린턴(전 미 대통령)을 생각나게 하네. 국정운영 방식보다는 개인의 스캔들에 언론의 관심이 더 쏠렸고, 화이터워터 스캔들이 특별검사의 손에 넘어갔듯이 장수촌 문제도…. 클린턴은 그래도 재선에 성공했네. 노 대통령도 그런 끝맺음이 가능할 것 같은가?”라고 묻고 있었다.

그랬다. 재임중 내내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은 2000년 ‘성공한 대통령’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고, 아내 힐러리는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니 ‘성공’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다.

노 대통령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의 활동이 막 시작됐다. 우리는 언론의 조명을 받는 김진흥 특별검사를 통해 대통령의 또다른 사생활과 주변인물들의 비리를 접하게 될 것이다. 청와대는 언론이 국가운영이나 정책, 민생문제보다 대통령의 사생활에 왜 더 관심을 갖느냐고 불평하겠지만 그것은 우리 언론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언론의 속성이다. 어렵고 딱딱한 ‘국정뉴스’보다 흥미진진한 스캔들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있는 한, 특검이 대통령의 진퇴에 영향을 미치는 한, 언론은 대통령의 사생활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권위지로 평가받는 워싱턴 포스트(WP)와 뉴욕 타임스(NYT)도 클린턴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의 사생활은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샅샅이 뒤졌다. WP는 화이트워터 스캔들 조사와 관련해 백악관이 사전에 재무부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특종보도했고, NYT는 힐러리가 1970년대 말 상품시장에서 1,000달러를 투자해 10만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는 사실마저 까발겼다. 힐러리의 투자와 화이트워터 스캔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NYT는 화이트워터 관련 서류가 공개되는 것을 힐러리가 왜 그렇게 반대했는지 그 보도로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ABC방송은 94년 2월 어느날 ‘월드뉴스 투나잇’ 22분중 18분을 화이터워터 스캔들에 할애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초기 뉴스 시간 내내 그 사건만 다룬 CBS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3월에는 방송 3사가 한달간 무려 220분을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할애했다. 방송들이 대통령과 그 주변을 어떻게 뒤지고 다녔을지 짐작케 한다.

그 결과, 엉뚱한 주변 인물들이 유탄을 맞았다. 백악관 법률 고문 빌 케네디는 가정부가 사회보장세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사임했고, 클린턴의 친구인 웹 허블도 전에 근무했던 아칸소의 로즈 법률회사와 영수증 발급에 관한 분쟁에 휩쓸려 나중에 횡령혐의로 기소됐다. 클린턴 주변인물 중에서 과거 부정한 일이나 부도덕한 행위가 있었다면 예외없이 두들겨 맞았다. 대통령 주변에 없었다면 그 동안 쌓아올린 명예가 실추될 일도, 사법처리도 받지 않았을 터다.

가장 상처를 받은 이는 힐러리가 아닐까 싶다.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에서 대가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힐러리도 스캔들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백악관 대책회의에서 여러 번 눈물을 비쳤다.(조지 스테파노폴로스 저 ‘너무나 인간적인’ All Too Human 참조) 기구한 운명이었다. 미 하원 법사위가 73년에 구성한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혐의 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힐러리가 25년 뒤 남편이 탄핵대상에 오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닉슨은 자신의 재선위원회가 불법적인 목적에 사용한 돈을 은폐하도록 승인한 증거가 담긴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거짓말이 들통나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비서실장은 사법처리됐다.

검찰 발표대로라면 노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쓰고 남은 돈 수억원을 장수촌의 빚 변제에 쓰라고 지시하고, 후원회장의 땅 위장매매도 사전에 보고받았다. 측근들이 불법 자금을 받는 현장에도 있었다. 더구나 노 대통령은 의혹을 해명한다며 교묘하게 둘러대기까지 했다.

진실은 특검 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대통령의 불법 의혹은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된다. 이럴 때 ‘스캔들 메이커’ 클린턴이 어떻게 그 후유증과 언론 공격에서 벗어나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측근들은 어떻게 대통령을 보좌했는지, 그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그것을 알려주는 책들은 여러 권 나와 있다.

입력시간 : 2004-01-0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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