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은 너무 무식했다""정쟁에 정열과 시간만 낭비", 吳風 남기고 '아름다운 퇴장'

[인터뷰] 불출마 선언한 오세훈 의원
"정치판은 너무 무식했다"
"정쟁에 정열과 시간만 낭비", 吳風 남기고 '아름다운 퇴장'


오세훈(43) 한나라당 의원은 당내 소장파 모임 ‘미래연대’ 대표를 지냈을 정도로 개혁적 색채가 강한 초선이다.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평가에서도 좋은 성적표를 받아 왔고, 지역구(서울 강남 을)도 한나라당 지지기반이 두터워 비교적 탄탄한 편. 그래서 그는 물갈이 파고에서 한참 비켜 서 있었고, 이번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그가 17대 총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해 정치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는 ‘오풍(吳風)’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그의 ‘퇴장’을 칭찬하는 네티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잘 나가던 그는 왜 ‘정치와의 별거’를 결심했을까?

불출마 선언(6일) 다음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그를 만나 2시간여 동안 그의 심경을 들었다.

▲ "이정도인줄은 정말 몰랐다"

-정치 입문 전 밖에서 생각했던 정치와 4년간 직접 체험해 본 정치를 비교한다면.

“아마 정치판이 이런 줄 알았다면 안 들어왔을 것이다. 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할 때 법을 만들려고 뛰어다니면서 의원들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다. 치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환경 관련 입법을 직접 해보려고 들어왔다. 그런데 정치권의 일하는 방식은 너무 무식했다. 4년 내내 소모적인 정쟁에 정열과 시간을 소진하는 구조였다.

일부 정치인은 정책 토론의 장이 돼야 할 국회를 전쟁터로 만들어 자신의 입지를 도모하고 정치적인 야심을 달성하는데 이용한다. 이런 메커니즘이 정치공학적으로 체질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환상을 갖고 들어오는 초년병(초선 의원)을 강경투쟁의 장으로 내몰아 ‘국회는 정치 원칙에 충실한 곳이 아니다’며 물빼기 작업부터 한다. 등원 초기부터 (초선들) 기를 꺾어 놓는다. 이의를 제기하면 야단치며 기운을 뺀다. (나도) 등원 초기에 동료 의원과 인간관계를 맺기 전에 입바른 소리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의견을 내도 선거나 당 단합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비난 받기 일쑤였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그 논리에 동화돼 주저하게 되고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됐다.”

-지난해 9월부터 불출마 결심을 해왔다고 밝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정리했나.

“재작년 대선 패배 이후 당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바뀔 줄 알았는데 안 그랬다. 대선 당시 후보 비서실 부실장으로 이회창 총재를 가까이서 모신 죄로 뭘 바꾸자고 말하는 것도 격에 맞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난해 여름 전당대회 때도 바뀔 조짐이 없었다. 그래서 (개혁 성향의) 초ㆍ재선들이 모여 ‘이래선 안 된다. 내년 총선에서 진다면 이 정권에 계속 밀릴 수밖에 없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후 다시 모인 자리에서 30ㆍ40대가 한나라당을 외면한 것은 5ㆍ6공 인사들 때문이라고 정면으로 제기하자고 했더니 (일부 의원들이) 망설이더라.

이 당의 주인들이 그 사람들인데 분당을 각오하지 않는 한 턱도 없는 소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죽겠다고 했다. 그 때 최악의 경우 사퇴하자는 생각을 했다. 이후 9월에 열린 당 연찬회에서 내 생각을 20분 정도 강하게 이야기했다. 선배들이 잘못해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17대 총선에 이겨서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5ㆍ6공 이미지를 걷어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차기 대선도 담보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 자리에서 나도 이미 기성 정치인이고 후배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로 물러가겠다고 했다. 그 때 필요하다면 사퇴까지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전 총재에게는 불출마 선언을 미리 알렸나.

“지난 4일 세배도 하고 결심도 전할 겸 찾아뵈었는데 말씀 못 드리고 나왔다. 그 자리에 여러 분들이 계셔서 형편이 안돼 ‘다음에 말씀 드리겠다’고 한 뒤 나왔다. 그런데 불출마 선언을 하고 나자 전화를 주셨더라. ‘말 하려고 했던 게 그런 일인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7일 아침에 찾아 뵈었다. 이 전 총재께서 ‘내가 오 의원을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않았느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신 같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당에 꼭 필요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영입할 때는 정치판이 지저분하다고 미리 다 얘기를 했다. 그런데 오 의원에겐 그런 얘기를 했던가’ 하시길래 ‘안 하셨다’고 했더니 다시 여러 차례 미안하다고 하셨다.”

▲ 기득권이 정치발전의 걸림돌

-대선에서 패배한 뒤의 심정은.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라는 게 뻔한 사실 아니냐. 상당히 염려했지만 이 정도로 비전이 없을 줄은 몰랐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중책을 맡는 것은 죄악이다. 노 대통령을 보면 대통령이 되겠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어떤 일을 하겠다고 착실히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회의적이다. 나라를 그런 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회의를 품고 이 총재를 도와 열심히 했는데…(대선 패배 후) 상당한 좌절감에다 회한까지 겹쳐 의기소침한 상태로 몇 개월을 보냈다.”

-물갈이와 함께 우리 정치 발전을 위해 시급한 것은.

“정치인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최대한 빼앗으면 자동적으로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 지금 의원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너무 많다. 그러니 다들 욕심 내서 의원이 되고 싶어한다. 의원이 일하는 실무적인 자리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런 쪽에 뜻이 있는 사람들만 할 게 아닌가. 사실 물갈이는 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

-기득권을 예로 든다면.

“후원회 같은 것이 단적인 예다. 정치인들이 터무니없이 돈을 걷어 쓰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많은 의원들이 후원회를 통해 돈 많은 사업자들에게서 수백만, 수천만원씩 잘 받아쓴다. 이 때문에 의원들이 의정활동은 안중에도 없고 후원회를 관리하러 밤 늦도록 다닌다. 웬만한 의원들의 후원금은 연간 4억, 5억원씩 된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는지. 지방자치단체장은 더 심하다고 한다. 숨 쉬는 것 말고는 모두 이권사업과 관련된 것이라는 우스개도 있지 않나. 내가 아직 현역 의원이라 더 이상은 신랄하게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오 의원의 경우는.

“도저히 이대로는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없다. 지금의 정치 시스템으로는 정치인이 정상적으로 클 수 없다. 나는 천성적으로 남에게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돈을 주는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후원금도 결국 뇌물이 되는 것 아니냐. 돈 받기가 겁났다. 아주 재력이 많지 않으면 남의 돈 안 받고 정치를 할 수 있는 가망이 없다. 정치하다 보면 이런 돈 저런 돈 다 끌어다 써야 하는데 나는 그게 안된다.”

-차기 서울시장 선거 출마에 나서려고 불출마 선언을 했다는 시각도 있는데.

“준비되지 않고 비전 없는 사람이 중책을 맡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야당 의원 4년 한 것은 서울시장 감으로 충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불출마 선언을) 서울시장 출마에 갖다 붙이는 것이야말로 기성 정치권적 시각이 아닌가.”

▲ 환경전문 변호사의 길 갈 것

-앞으로 TV토론 사회자 제의가 온다면.

“연락이 와도 안 한다. 방송을 진행하면서 환멸을 많이 느꼈었다. TV토론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프로그램이 몇 개나 있나. 어떻게든 토론자끼리 싸움을 붙여 시청률을 올리려고 혈안이 돼 있지 않나. 내가 (과거에) 그것 때문에 진저리 쳤는데 또 해?”

-향후 계획은.

“16대 국회가 끝나는 대로 외국에 나가 환경관련 공부를 할 생각이다. 앞으로 환경전문 변호사의 길은 계속 갈 것이다. 이제는 시민운동을 해도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4년간의 의정활동 경험이 상당한 자산이 될 것 같다. 이제 어디를 공략할 지 (입법부의) 급소도 알고 있다.”

김성호기자


입력시간 : 2004-01-14 16:08


김성호기자 sh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