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새로운 역사 만들기


“러시아 삼색기(국기)는 어느 곳에 올라가든 절대로 내려오지 않는다.”

동유럽의 혁명 기운을 억누르고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완성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년)는 식민지 확장 정책에 대해 자신감에 차 있었다. 말발굽과 총검으로 건설된 러시아 제국이 바야흐로 돛을 올리고 해양대국으로 뻗어나가려던 참이기도 했다. 차르(황제)의 배려에 힘입어 백설같이 흰 제복의 해군장교는 제국의 별이었고,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크림전쟁(1853∼56년)에서 터키와 영국 등의 연합군에 패해 대양 진출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러시아 해군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다.

지중해를 피해 동쪽으로 눈을 돌린 러시아 해군은 남하정책의 거점으로 중국의 뤼순(旅順)항을 선택, 바다를 향해 러시아 삼색기를 높이 올렸다. 그 때가 1898년 3월30일. 크림전쟁의 패전을 딛고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6년 뒤인 1904년 2월9일, 뤼순항 전대소속 순양함 바랴그와 포함(砲艦) 카레예츠 등 함정 3척이 인천(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고, 인천항쪽으로 도망간 바랴그호는 끝내 자폭했다. 러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극동에서 날아온 패전 소식에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년)는 격노했다. ‘갈매기’를 쓴 극작가 안톤 체홉마저도 종군 의사나 기자로 자원할 만큼 러시아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04년이면 러시아가 해군 창설 200주년을 넘겼을 때였다. 제독만 해도 100여명에 이르러 영국(69명)도 러시아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크림전쟁을 치를 때 아직 현대적 함정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소국’ 아니었던가.

니콜라이 2세의 명령에 따라 당시 최고의 제독중 한명이었던 마카로프 제독이 뤼순항으로 달려갔다. 마카로프는 문호 톨스토이가 ‘뛰어난 도살기계’로 기술할 만큼 해전에 능한 지휘관.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해상 충돌은 이제 인천 앞바다에서 뤼순에 이르는 넓은 해역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마카로프는 해전에 능하고 도전적이었으나 뤼순항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게 흠이었다. 뤼순항 점령 6주년 기념식에서 ‘삼색기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되뇌었던 마카로프는 곧바로 일본 함대를 추적하다 거꾸로 일본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혀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호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무너지는 러시아 해군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상대는 그 유명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었다. 오랜 무사 가문 출신으로 대영제국의 함포 위력을 직접 체험한 뒤 함대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 해군의 영웅이자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뜻하지 않게 큰 망신을 당한 러시아는 도고 제독을 잡기 위해 최강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러일 전쟁을 엄격한 러시아 시각으로 기술한 책 ‘짜르의 마지막 함대’(콘스탄틴 플레샤코프 지음)는 바로 발틱함대의 극동정벌을 그리고 있다. 러일 전쟁을 촉발했던 2월9일의 인천 앞바다 해전에는 큰 주목을 보이지 않는다. 마카로프 제독의 사망이후 뤼순항의 운명과 마지막 결전장이었던 쓰시마 해전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1905년 5월27일 새벽, 마지막 결전은 싱겁게 끝났다. 1시간 만에 러시아 발틱함대 38척 가운데 19척이 침몰했고,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포함해 6,1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지금부터 꼭 100년 전 인천 앞바다의 패전을 시작으로 마카로프 제독의 수장과 쓰시마 해전의 패배 등 극동에서 일어난 치욕의 역사를 아직도 러시아는 잊지 않고 있다. 당시 자폭한 순양함 바랴그와 카레예츠(한국이라는 뜻)호의 이름을 승계한 함정들이 인천을 방문, 러시아 병사들에 대한 추모비 건립식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역사의 교훈을 되씹으며 다시는 동북아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려는 듯하다. 상대였던 일본 역시 과거사의 반성 위에서 군사강국으로 거듭 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100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손을 놓고 두 나라의 ‘역사 만들기’를 지켜보고 있다. 기껏해야 러시아 추모비 건립을 둘러싼 논란이나 벌리는 수준이다.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반도국의 숙명을 지닌 우리는 역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러일 전쟁 100주년만 해도 그렇다.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해군을 2ㆍ9 해전의 현장으로 초청해 화해와 협력의 장을 조성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역사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또 러일 양국에서 찾을 수 없는 전쟁 관련 유물이 인천 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하니, 관광 패키지 상품으로 개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 국회, 시민단체 등 모두 눈앞의 4ㆍ15 총선에만 함몰돼 있다. 국가 지도층의 역사 의식이 아쉽다.

입력시간 : 2004-02-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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