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용산기지의 이미지


주한 미군 사령부가 있는 용산기지 이전을 위한 기본합의서와 이행합의서를 마무리 짓기로 했던 제7차 미래 한ㆍ미 동맹 정책구상회의가 2월 13~14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렸지만 합의에는 실패했다. 1991년부터 이 정책을 구상했던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은 “이전에 따른 비용을 30억 달러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는 마스터 플랜을 확정, 4월의 워싱턴 회의에서 합의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성립된 후, 미 8군은 서울대 본관이 있던 동숭동에서 현재의 용산으로 옮겨왔다. ‘미래동맹 구상회의’가 있기 하루 전인 12일 노무현 대통령은 “용산 지역은 과거 청나라, 일본군, 미군 등이 주둔한 곳인데, 이제 그와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벗을 때가 됐다. 용산 기지는 이전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자유총연맹 임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밝히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또 “미국이 용산기지를 이전하려는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 변화에 따른 것”이라며 “우리의 안보 역량과 국방력에 맞게 우리가 책임질 것은 지고 남에게 도움을 받을 게 있으면 받으면 된다”고 했다. 노 대통령과 차 실장이 언급한, 용산에 얽힌 주한 미군의 역사성과 주둔에 대한 현실적 상징성은 올바른 것일까.

그 해답은 미 오하이오 주립대 애런 미레트 교수(군사역사학)의 ‘한국을 위한 그들의 전쟁’(2002년 10월 출간)에서 엿본다. 미레트 교수는 예비역 해병대 소장으로 1986~2001년 네 차례 이상 한국을 찾았다. 그 때마다 한국 전쟁에서 생존한 한국인 16명을 비롯, 한국인을 도운 미군(21명), 참전 우방군인, 북한ㆍ중국ㆍ러시아군 병사 등 46명을 인터뷰해 책을 썼다.

그는 해병중위로 장교 기초반 교관을 하던 1960년 한국 해병 장교들의 훈련태도를 보고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제대 후에는 전쟁사에 빠져 ‘이겨야 하는 전쟁-제2차대전사’를 쓴 뒤 91년 서울 국방대학원과 연세대에서 교환교수로 전쟁사를 가르치며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미 8군의 전사실, 한ㆍ미 연합사 전사실에 사무실을 얻고 한국전에 직ㆍ간접으로 참가한 여러 인사들을 면담했다. 그것은 역사적 상징 속에 묻혀버린 전쟁속에서 겪은 인간들의 고뇌와 한(恨)을 밝혀 내는 일이었다. 전쟁이란 상징이 인간에게 미친 이미지를 찾는 것이었다.

그가 용산 미 8군의 ‘역사적 상징성’으로 든 인물은 주한 미군사령부 클럽인 ‘하트웰 하우스’의 지배인 소니 방이다. 미 육군 원사인 그는 북한의 황주 출신으로 봉순국이 한국이름이다.

한국전쟁을 통한 소니 방의 인생전변(轉變)은 주한미군의 숱한 변화에 버금간다. 11세 때인 1950년 10월 평양에서 후퇴하는 미 8군과 함께 평택과 인천을 거쳐 의정부까지 왔다. 형 순조씨와 함께 의정부 주둔 미 제1기갑사단의 노무자로 일하다 식당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형과 헤어졌다. 그러나 이 사단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후속 부대인 45사단(오클라호마 예비사단)에게 인계됐다.

1951년 12월 그는 한국노무단에서 일하던 형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 이유를 알아보기도 전에 45사단과 함께 철의 삼각지로 이동했다. 마침 인근 한국사단에 김치와 밥을 얻으려 갔다가 남하한 불순분자로 오인되어 헌병대에 넘겨졌는데, 그때만 해도 드물었던 45사단의 흑인 장교 영 중위가 그를 스카치 위스키 6명을 주고 빼내왔다. 영 중위를 평소에 그를 ‘스코시’(꼬마라는 일어)라 불렀다. 그후 그는 미군 부대에서 식당 보조원, 통역, 수색대원, 밀거래꾼으로 일하다 휴전을 맞았다.

미군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소니 방은 이미 익힌 영어로 미군 클럽을 전전하며 미국 행을 꿈꿨다. 드디어 63년, 귀국한 45사단 상사들이 모금운동을 벌여 보내준 돈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자식을 위해 한국에 가고자 미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66년에야 입영이 허가됐다. 그의 아들은 존홉스킨대 전자ㆍ컴퓨터 학과를 나온 현역 장교이고, 그의 딸들은 아메리카대학을 나왔다. 그는 군에서 원사에게 주는 근무훈장을 받았다.

소니 방은 91년 45사단 참전용사들의 한국전 전적지 방문단과 함께 서울에 와 50년간 행방불명됐던 형 순조씨의 유해를 찾아 국군전사자로 국립묘지에 안장시켰다. 그는 비록 한국 군적이 없는 미 육군 원사이지만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조상에 성묘하고 맛있는 황주 사과를 먹고 싶다”는 것이다.

용산 기지는 봉 원사에게는 제2의 고향이었고, 삶의 상징이었다. 용산 기지는 역사의 상징을 넘어 이미지가 되었다.

메리트 교수는 지적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어느 경제학자는 황폐해진 남한을 부흥시키기 위해 1953년부터 3년간 매년 10억 달라씩 무상원조 해야한다고 했다”고.

노 대통령도 용산 기지를 역사적 상징으로만 볼 게 아니다. 미국측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차관보도 기지 이전 비용을 30억 달러 이상 주장해서도 안 된다. 차기 회의에 앞서 메리트 교수의 ‘한국을 위한…’을 읽어보길 바란다.

입력시간 : 2004-02-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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