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차라리 떠나고 싶다


자동차 두 대가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한다. 아니,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절대절명의 순간, 운전자가 차량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꺾어야 한다. 담력을 시험하는 시합으로는 이것보다 더 짜릿한 게 없다. 치킨겡미(Chicken Game)의 마력이다. 승부의 결과도 분명하다. 먼저 뛰어내리거나 핸들을 꺾는 쪽은 겁쟁이가 되고, 끝까지 버티면 둘 다 죽음을 면치 못한다. 치킨게임이 핵 위기 때 국제정치학 용어로 자리를 잡은 동기도 새겨볼 만하다. 자신이 보유한 핵무기만 믿고 상대방이 굴복하도록 밀어 붙이다가는 지구촌 전체가 침극에 이를 수 있다는 교훈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 무대에서는 치킨게임이 교훈적 용어가 아닌 모양이다. 아수라장 국회에서 한나라 민주당 자민련 3당이 거리낌없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는 걸 보면 한번 해볼 만한, 저질러 놓고 나중에 언제든지 주워담을 수 있는 치킨 그릇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야당의 탄핵 명분은 4·15총선에 '올인' 승부를 시도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한마디였지만, 한 꺼풀 벗기면 안개 속을 헤매는 총선 기선잡기요, 서바이벌 게임이다. 어차피 죽고 살기의 싸움으로 진행될 판이었던 건 확실하나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차량에서 뛰어내리든가 핸들을 꺾어 참극을 피해야 했다.

제 3자인 외신들이 지적한대로 '그까짓 사소한 일로 대통령을 탄핵을 하다니' 하는 놀라움이 국민 정서이고 대다수 여론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탄핵 반대 의견이 70%에 가깝다. 대통령의 선거개입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것이 선관위의 판단이지만, 상식적으로 보나 이성적으로 보나 탄핵을 요구하기에는 못 미치는 잘못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한다고 발끈해 정국을 죽음의 치킨게임으로 몰고 간 야당은 탄핵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간단한 교통법규 하나 통과시키는 것쯤으로 여겼던 국회였으니, 그 업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이성과 민심, 그리고 민주 진보 세력의 승리'라고 환호작약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의 탄핵 결정을 뒤집기 위해 문재인 전 민정수석을 불러 들이는 등 수선을 떨고 있는데, 겸허한 자기 반성의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대통령이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의 안위를 보장하는 일이다. 탄핵 이후 나라의 혼란과 분열, 사회 대립이 불안을 조성할 정도로 심화할 터인데, 대통령은 치킨게임에서 겁쟁이가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그것을 방치한 것은 아닌지 먼저 반성해야 옳다. '설마 탄핵까지 가랴'는 안이한 인식과 대처는 앞으로 구가의 안보를 뒤흔들 중대 상황에서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노 대통령에게는 질주하는 차량의 핸들을 돌릴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처음부터 '사과만 하면 철회할 탄핵안'이었고, 탄핵안 발의 이전의 여론도 사과하라는 쪽으로 흘렀다. 11일의 특별 기자회견에서 측근들의 비리와 함께 부적절한 선거 관련 발언에 사과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무슨 의도였는지, 그는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탄핵 위기에 정면돌파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측근 비리도 막을 만큼 막았다고 강변하는 듯했다.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분석처럼 노 대통령이 4·15총선 승리를 위해 '탄핵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아래 의도적으로 야당의 화를 돋궈 탄핵 강행을 유도했다면 국민의 안위를 지켜야 할 대통령의 직무 자체를 유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과 국회 둘 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중적 체제다. 그래서 '정치의 본질은 타협'이라는 말이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더욱 무게를 지닌다. 게다가 우리는 재작년 대선 때 지역 분열에다 계층 및 세대간 대립가지 겹쳐, 나라가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국론 통합과 갈등 극복이 최대 과제였으나 노 대통령 1년은 그것을 부추긴 면이 없지 않았다.

조선조 당파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순조 시절,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은 "권세는 친형제간에도 나눠지는 게 아니어서…" 라며 권력 분점의 어려움을 간파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났는데, 여지껏 정치적 타협과 권력 균형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면 대통령이나 국회의 의식 수준은 여전히 당파싸움 시절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헌법재판소는 법적인 판단을 하는 만큼 정치적 판단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놔둔 것은 그의 정치력이나 리더십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정국운영 지지도도 그 동안 30%대에 그틈? 그런데 아직도 야당과 치킨게임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차라리 나라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3-19 20:31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