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따질 것은 따지고 가릴 것은 가려야


국회가 난장판 속에서 대통령 탄핵을 밀어 붙이는 ‘간 큰’ 행동을 할 때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니, 한 열흘쯤 지나자 반복되는 TV 화면도 슬슬 지겨워 지고 촛불 시위에도 불안감이 돋기 시작한다. 아, 그렇다고 탄핵을 찬성할 생각은 없다. 우리의 주변 상황이 마냥 탄핵 쇼크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일깨워 준 탓이다.

이웃 대만에선 총통 선거를 몇 시간 앞두고 총통이자 여권 후보가 피격되고, 선거 결과에 대한 찬반 시위가 거세게 타오르는가 하면, 이라크에 파병한 스페인에선 열차 폭파 테러가 일어났다. 4ㆍ15 총선과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둔 우리로서는 예사롭게 넘길 일들이 아닌 듯하다. 탄핵 사태가 사회 각 부문의 이해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냉혹한 국내외 정세에 비춰 최우선적으로 탄핵의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정치권 일각에서 총선 지형을 유리하게 가져 가기 위해 탄핵 반대 대 찬성, 친노 대 반노 등 편가르기에 앞장서고 있으니 볼썽사납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사소한(?) 사안으로 탄핵 위기로 몰렸던 클린턴 미 대통령과 그 지지 세력이 취한 태도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클린턴에 대한 탄핵 사유는 대배심 위증과 사법 방해 등 2가지였다. 대배심 위증은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소명 과정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부인한 혐의고, 사법 방해는 제 3자에게 위증을 교사한 혐의다. 그러나 학자들은 물론 국민 여론(60%)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잘못했으나 탄핵까지는 아니다’ 였다. 뉴욕시립대 공동후원자인 아서 슐레진저 2세 등 헌법학자 400여명은 탄핵 거부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상하원에 보내기도 했다.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도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 에서 탄핵 전후 상황을 기술하면서, “저도 남편이 한 짓이 못마땅합니다. 하지만 탄핵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중략) 대통령의 정책을 방해하기로 작정한 세력이 벌이는 정치적 전쟁의 일환입니다”고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클린턴은 부인의 심정과는 달리, 공화당의 탄핵 압박을 ‘이겨야 하는 전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자신과 상대가 모두 ‘윈 윈’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진실을 찾아 깊이 사색하는 고통을 시간을 가졌습니다.(중략) 참회가 진실되고 한결같다면 우리 나라를 위해서도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던 것은 그래서였다.(‘살아있는 역사’중에서)

클린턴의 이 같은 자세는 대통령직의 무거운 책무를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과만 하면 끝날 탄핵 위협을 안일한 상황 판단과 처신으로 헌정 중단을 자초한 노 대통령과는 판이하다. 한술 더 떠 그 책임을 모두 국회쪽에 덤터기 씌운다면 우리는 이 난리를 겪고도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게 아닐까.

국민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1998년 여름 하원 본회의가 클린턴 탄핵을 발의한 뒤 이듬해 2월 상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미 국민은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갖고 중간 선거에서 책임의 소재를 따졌다.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 중 치러지는 중간 선거는 국민의 견제 심리로 여당이 패배한다는 관례를 깨고 1822년 이후 처음으로 여당의 의석을 늘려 주었지만 ‘화풀이’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여당도 선거에서 ‘탄핵 반대’와 ‘하원 해산’이란 감정몰이로 나간 게 아니라, 대통령의 잘못을 적시한 뒤 이를 의회에서 바로잡겠다며 유권자의 이성에 호소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새 시대를 여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탄핵 쇼크에 휩쓸려 ‘묻지마 지지’식의 행태가 속출하고 있다. 잘 해야 100석 안팎이라던 열린우리당이 이제는 누가 나서든 말뚝만 박으면 된다는 ‘묻지마 지지’에 힘입어 총 299석중 200석을 넘본다는 소식이다. 지지도 30%에 그친 노 대통령이 저지른 국정 운영상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묻지마 지지’는 위험하다. 후보의 인물 됨됨이와 정당의 공약을 제대로 알고 찍자던 시민 단체들의 구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안타깝다. 위험한 이라크 파병, 북핵 6자회담, 실업 및 원자재난 등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노 대통령의 새 정치는 부패와 지역감정, 편가르기를 추방하고 인물과 정책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올바른 선택을 유도해야 하는 것일진데, 그것이 탄핵 감정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부끄러운 우리의 현주소다. 국민은 탄핵 사태의 잘 잘못을 총선에서 심판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따질 것은 따지고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 탄핵 시炷?수렁에 묻혀, 총선 민심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앞날에 도움이 안된다.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3-25 15:33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