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9선 JP가 할 일


이번 총선으로 ‘10’선을 놓친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4월17일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총선전 약속을 지키겠다. 총재직을 내놓고 2선으로 물러난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정계은퇴는 아니다”고.

1961년 5월16일, 35세의 나이로 ‘쿠테타’의 2인자 였던 JP. 그는 2004년 4월 어느날 유세장에서 ‘조용필’, ‘조용필’이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40여년의 정치 역정은 그가 늘 주장하는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84년 4월 그 그때까지 마지막 남은 해금 대상자 였으면서, 그때는 해직 교수였던 김동길 교수의 ‘3김 낚시론’(필자가 단 제목은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의 대상이었다.

김교수는 한국일보 ‘동창을 열고’목요칼럼을 통해 JP를 그렸다. “또 한분 김씨는 5ㆍ16혁명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하지요. 30대에 이미 이 나라 ‘넘버 투맨’으로 각광을 받을 때는 그에게 과거에 별을 4개나 달았던 어느 퇴역 장군이 정초에 온 가족을 거느리고 세배를 간 일도 있었다지요.”

김교수는 1960년 말 미국 월남전을 반대하는 하버드대생들이 행정관을 점령했을 때 이 대학 총장 네이던 푸지가 경찰을 불러 질서를 회복하고 사퇴할 때 한 말을 세 김씨(김대중, 김영삼)에게 충고한 것이다. 푸지는 사태 해결 후 이 사회에 아직도 1~2년이 남은 임기에도 ‘나의 때는 지났다”며 사표를 냈다. 후임을 경찰투입을 반대했던 법과대학 버크 교수에게 넘겼다.

김교수는 3김에 권했다. “단 하루도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본 일도 없는 세 분에게 ‘나의 때는 지났다’고 떠나라고 권하는 내 마음도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것밖에 길이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백의 종군하는 것도 위대 합니다. 그러나 아예 종군조차 안 하는 것이 민족을 위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결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줄도 압니다. 그러나, 십자가 조차도 사양하므로 조국을 빛 낼 수도 있는 일 입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 기수는 40대에서 나와야 합니다. …양김씨여 세김씨여 아직 빛이 있는 동안에 서울을 떠나세요. 어둡기 전에 어서….”

다만, JP만이 ‘서산(西山)을 벌겋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것을 바라며 아직도 ‘어두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럴까. ‘영원한 2인자’라는 그에겐 ‘태양은 하나’가 아니요 ‘내일이란 또 다른 해’가 있고 ‘서산에 지는 해’에게도 ‘어제 것은 어둡고’ ‘내일 것은 벌겋게 물들일 것’이란 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총재직을 내 놓지만, 정계은퇴를 하지 않는 것일 지 모른다.

‘나와 제 3ㆍ4공화국’(1982년 11월 출판)을 쓴, 5ㆍ16부터 유신 직전까지의 청와대 대변인, 총무처 차관, 수협 회장을 지낸 박상길은 회고하고 있다.

1966년 1월 7일 밤은 JP가 만 40세가 되는 날. 박 대통령은 그때의 내무부 엄민영 장관, 총무처 박상길 차관과 청구동 JP집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안방에는 이미 5~6명의 JP계 핵심 인사가 있었다.

그 때 대통령 재선(67년 5월)을 앞두고 박 전대통령은 공무원의 요정 출입 단속에 나서고 있었다. 분위기는 이런 것을 논하기에는 어색한 JP핵심들이 대통령에게 여러가지를 힐책하는 그런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핵심들에게 요정 출입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럼 자네들 말대로라면 마실 테면 마셔라, 무조건 맡겨두라 그런 이야기지?”라며 불쾌한 듯 술을 마구 들이켰다.

어색한 분위기에 그때 공화당 당의장인 JP가 박 차관에게 대통령을 모셔 갈 것을 귀띔했다. 박 차관이 일어날 것을 권유했다. “아니오. 내 좀 여기 볼일이 있소. 이 집 안방엔가 어디에 닛뽄도(日本刀)가 있을 텐데 그걸 좀 가져와야 겠소.”

박 차관이 대통령을 부추기며 나가자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닛뽄도로 저 쓸개빠진 자들의 목을 댕강댕강 치기 전에는 돌아 갈 수 없소.”

청와대에 돌아온 박 대통령은 침대에 모셔졌다. “돌연히 꽝하고 문을 제치며 튀어나온 대통령께서 느닷없이 권총을 찾는 것이었다. ‘내 권총으로 그 쓸개바진 대통령병 환자 놈들을 확 슬기 전에는 잠을 못 잔다.’”

박상길은 그 날의 광경을 마무리 짓고 있다. “나는 지금도 김의장 자신의 그 무렵 심정이 무엇이었는지 척도 할 수가 없다. 대통령 자신이 얼마간 취하시고 유쾌하지 못한 결과의 이야기로 대통령 환자라 소리지르신 터, 어찌 먼저 정상적인 정치가 두분사이에 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내 개인 견해로도 김 의장 쪽의 실수는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일까’하는 회의가 항상 머리 속을 떠날 수 없었다”

JP에게는 ‘대통령병 환자’, ‘왜 그리 서두르는 것일까’는 60년 말에서 시작했다. 세기를 넘어서 그는 ‘서산의 어둠’속으로 서둘러 사라질 생각이 없다.

그에게 ‘벌겋게 물들이며’ 사라질 기회는 있다. 10선을 못 했지만, 노 대통령이 추대하는 명예 10선 국회의원, 명예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이건 한나라당 최병렬 전 대표, 민주당 조순형 대표를 설득해 “17대 총선 민심은 탄핵 반대였다. 5월 마지막 16대에서 3당이 탄핵 취소를 바리의, 결의 하자”를 끌어 내는 것이다. ‘역사의 닛뽄도’를 피하는 길이다.

입력시간 : 2004-04-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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